한동마을과 도깨비 불
한라산 백록담물을 끌어들이는 마을 | ||||||||||||
한동마을과 도깨비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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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730년 전인 고려 충렬왕 3년 (1276) 몽고말 160두를 입식시켰는데 당시 목마를 책임진 감독관으로 좌형소(左亨蘇) 일행이 제주에 내려와 설촌을 이룬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좌형소는 중국산동성 청주(淸州)에 본관을 두고 원나라에서 천관시랑(天官侍郞)의 벼슬을 지낸 인물로 한국 좌씨의 시조이다. 그의 아들 좌자이(左自以)는 고려 말 당시 유명한 명의(名義) 로 고려왕후의 중병을 완쾌시켜 이에 탄복한 왕으로부터 한동 마을 서쪽 해안가의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지금도 이 일대를 ‘좌가장’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동 마을은 괴이리(槐伊里)라 불려왔다. 지금의 한동 마을로 불리게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옛날 이 마을에는 밤마다 바다 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깨비불이 마을 쪽으로 날아오곤 했다. 도깨비불은 집 처마에 붙어 삽시간에 집을 태웠고 피해는 날로 커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온 동네가 피해를 입어 망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밤마다 당번을 정해 마을을 지키기로 한다. 밤이 되면 여지없이 바다 쪽에서 도깨비불은 날아오고 , 당번들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은 잠을 자다 일어나 불끄기에 전념한다. 이 같은 일이 매일 밤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여기저기서 날아온 도깨비불을 끄고 나면 거기에는 불이 붙은 말똥이 남아있었다. 이 사실은 곧 관아에 알려지고 당시 제주목사는 누군가 방화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단정한다. 제주목사는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방화조사에 착수한다. 가뜩이나 도깨비불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마을 사람들은 목사에게 “도깨비불”의 조화라며 거듭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자 목사는 처음으로 불만을 드러낸 마을사람이 수상하다며 부하들에게 당장 “이놈에 상투를 풀어 말 고리에 묶어 매고 사실을 실토할 때 까지 관아까지 끌고 가라고 ” 지시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 중에 허씨 성을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러다가는 무고한 마을사람이 피해를 입겠다는 생각에 몰래 빠져나와 자기 집에 불을 놓는다. 결국 목사와 마을사람들은 허씨가 “ 불이야” 하는 소리에 모두 허씨 집으로 몰려가 불을 끄고 목사도 그때서야 도깨비불의 실체를 인정하며 마을 명칭이 괴이리( 槐伊里)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며 명칭을 바꾸라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을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오훈장’을 찾아가 마을명칭을 새로 지어달라고 부탁하고, ‘오훈장’은 한라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백록담의 물을 끌어당기는 뜻의 지금의 한동(漢東)이라 지었다고 한다. -자료: 제주관광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