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 연대기-간단히 살펴보기
세이레아트센터를 만드는 것은
민간소극장의 존재가 연극인들의 창작의 산실이자 기초이기 때문이다.
연극이 아니더라도 모든 무대예술인들은 무대를 간절히 원하며 창작발표의 무대를 원한다.
따라서 기초를 튼실히 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자생력의 약화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제주 소극장의 형태는 대략 1980년대 수눌음극단(?)의 <카페동인>에서 그 시발을 삼을 수있다.
그 전에 신문사 홀이나 YMCA강당 등이 사용되거나 예식장에서 극단들이 창단 공연되고 있음을 비추어 민간소극장은 전무했다.
그간에 탄생, 소멸된 소극장의 이름과 대표를 잠깐 기억해보면
극단하늘극장의 사강문화센터 박세일(터미널앞) 인형극 전문단체를 표방한 이 단체는 북교입구(칠성로)에 사무실을 두고 인형극 도내 순회공연과 인형극 강습등을 통해
활발히 공연을 하여왔으며 몇년후 야심차게 터미널 앞에 극장을 만들어낸다.수눌음이 이극장에서 공연도 갖은바있다.<사강문화센타 하늘극장>이라는소극장의 탄생이 아마도 제주연극사에서는 최초의 연극전용소극장이라고 할것이다.
극단이어도의 포켓극장이라고 부를 수있는 <이어도 작은무대>(중앙로)는 서울 극단 에저또의 방태수 선생님이 만든 극장에서 힌트를 얻어 마련한 그야말로 작은무대이다.아돌후가드의 작품"어느 부도덕한 여인의 증언"을 장기간 걸쳐 공연한 바 있다.김승재 연출에 강상훈 현숙희가 호흡을 맞추었다.
동아생명의 동아문화센터(신제주) 아마도 기업체에서는 전무후무하게 처음시도한 소극장인데 다목적홀로 그 기능을 다하였지만 몇년 뒤 그 기능을 다하고 문을 닫았다.
극단자유무대의 자유무대 임필종(여상앞)은 극단이어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배우였다.나름의 목표를가지고 워크?도 추진 하며 공연을 만들어가는데 여력이 채 미치지 못하여 극단세이레극장과 연대하여 극단통합을 하여 세이레의 창단 공연작품 위기의 여자(시몬느드보봐르)를 자유무대에서 공연하면서 흡수 병합된다.
이후 극단세이레극장이 자유무대 간판을 내리고 <세이레소극장>(강상훈)으로 만 7년간을 운영한다.
소극장의 활성화를 위하여 장기공연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무모한 도전을 하여 작품을 선정하여 <배비장전>,<콜렉터>,<굿나잇마더>를 한달간씩 각각 공연을 한다.
그후 "제1회소극장 축제"를 자력으로 치루었는데 참가극단이 모두 5섯 단체가 된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극단세이레<북어대가리>,극단아라<호적등본>,극단다솜<팽철학>,극단무<또 해피엔딩>,창원극단 미소<색시공> 그때 당시 신문을 보면 관객이 평균50명 정도가 되어 소극장연극의 발전가능성을 둔 의미가 있는 기획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기운이 소진하여 운영난에 부딛혀 문을 닫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극다솜동우회가 끼어들어 소극장 살리기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길에서 전단을 돌리고,일일찻집도 운영하고,마침 경남 에서 연극하시는 선배인 이상철 선배님이 모노드라마<술>을 가지고 돕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이레소극장은 역사속에 문을 닫게된다.러시아에서 유학을 하고 서귀포에 둥지를 튼 이건동 무언극연구소의 토요강좌를 마련하여 이색적인 공연워크샵작품<나>를 공연한뒤 소극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한편 극다솜동아리의 작은무대(변종수)에서는 소극장을 마련하여 <선생님 저 정신 병자>공연에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하여 매진사례를 기록하여 소극장사에 일획을 그린다.그러나 기쁨도 잠시 어렵게 문을 연 소극장을 닫게되어 세이레소극장과 공동의 운영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 지인이 소유한 신축건물에 소극장을 만든다는 소문이 나더니 예인아트홀(동문로타리)(송윤규)이라는 이름으로 그 탄생을 알려온다. 현재까지 극장은 그대로 있으나
운영에 실패한 극장으로 오점을 남기게 된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래도 도내 극단의 운영과 방식, 그리고 연극의식이 너무 근시안적이고 편협적이어서 소극장까지 눈을 돌리지 못한 탓이 크지 않았나 생각한다.
얼마후 서귀포에 둥지를 틀고 있던 이건동은 한국무언극연구소라는 이름을 극단한얼로 바꾸고 한얼소극장(관덕정)(이건동)을 개관한다. 40석규묘의 아담한 소극장은 관청인 제주시청이 있던 고색찬연한 건물이다. 맨손으로 식구들이 달려들어 만든 이 소극장은 7년간이나 운영되어 고군분투하더니 실체없이 흔적만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용담동으로 이사를 간 세이레는 휴유증이 심하여 간신히 공연을 만들어간다.그 사이에 여력을 갖추어 다시금 소극장을 개관하나 뒷심이 부족하였다.
극단세이레극장의 세이레소극장(용담동)(강상훈)은 놀이패한라산 의 정성어린 굿에도 불구하고 얼마가지못하여 문을 내리게된다.
소극장은 그렇게 어려운가. 용담동 시대를끝내고 갈데가 없어진 세이레는 짐을 대거 처분한다. 그래도 산더미처럼 만은 짐은 어디 둘데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후배의 수소문으로 꽃방 지하에 짐을 두어도 좋다는 낭보가 들어온다. 몇달에 걸쳐 짐을 옮긴다.이미 기운은 빠져있었다.
초라하고 지친 영혼을 어디둘데가 없었다.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이년정도 시간이 약이라든가? 정비를하고 기운을 차리고 수습을 하기시작한다.
흐트러진 짐들을 정리하고 페인트를 하기시작하자 어느 정도 모양이 갖추어 졌다. 다시는 지하생활을 하지 않으리-그 다짐은 다 어데가고 마음을 추스리니 궁퉁이가 보인다.애정이 붙기시작한것이다.그래 이 공간에서 다시 도전을 하자. 마음먹기가 무섭게 정비를 시작한다.그러나 나리 태풍은 우리를 정신이 가게 만들었다. 침수.
망연자실 할 겨를도 없이 양수기를구한다.물을 퍼나른다. 동분서주 하였다.
특별재해구역이라는 국가의 결정으로 국민성금을 받는다.그리하여 극단세이레는 수해를 딛고 그 짐을 치우면서 다시금 소극장의 꿈을 꾼다.
이제 다시 지금 하지않으면 언제 하리.
한편 머리에 꽃을 이라는 거리예술축제를 감행하던 다원예술팀이 소극장을 마련하여 여고입구 사거리 간드락마을 입구에 "간드락 소극장"이 탄생한다.
80석 규묘의 이 극장은 현재 소극장 운영자금을 지원받아 5개작품을 진행하고 있으며 현 관객집계가 3,000명을 육박하고 있다.
신제주 코스모스사거리에 자리한 극단세이레극장은 소극장의 이름을 세이레아트홀(강상훈)로 정하여 이제 막 기지개를켜고있다.
세이레아트센터의 배경을 살펴보면
세이레아트센터는 그 기능을 크게 두 줄기로 하여 운영된다.
첫째 예술교육의 요람이다. 예술교육은 크게 연극놀이와 명상, 예술치유, 실버댄스, 웃음 등 각종 강좌를 연중 유치 할 것이다.
둘째 무대예술의 창작발표무대이다.무용, 음악(국악, 클래식), 전위, 마임, 마술, 연극, 낭독의 무대 등을 유치하여 각 고유한 색깔을 보여줄 것이다.
세이레 아트센터 위치
KBS제주방송총국에서 KCTV제주방송국 방향으로 코스모스호텔 옆 건물 지하에 있다.
같은건물 3층에 복된교회 2층에 신대벌 부동산 1층에 길슈퍼가 있다
길슈퍼 지하가 극장 정문이며 옆으로 따라가면 아름누리꽃방이 있는데 그곳도 하나의 비상통로 구실을 한다.
세이레아트센터 대표전화 064-744-8911/744-9188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ayre Http://cafe.naver.com/sayre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