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능성이 숨쉬던 한 해-원종찬
다양한 가능성이 숨쉬던 한 해
Ⅰ. 중흥기를 맞이한 아동문학
방정환 탄생 백주년 기념의 해인 1999년, 한국 아동문학은 급작스러운 호황 국면에 들어섰다. 우리 나라에서 아동문학이 본격적으로 출발한 1920년대를 ‘아동문학의 황금기’라고 일컫는 것과 비교할 때, 최근은 제2의 도약기 곧, ‘중흥기’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신진 작가층이 빠르게 전진하고 있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들이 잇달아 아동물에 힘을 쏟아 붓고 있다. 젊은 편집진의 참신한 기획과 아이디어로 책들은 한층 세련된 꼴을 갖춰간다. 비평과 연구 분야에도 젊은 세대가 눈을 돌린다. 크고 작은 아동문학 강좌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좋은 책을 골라주려는 학부모들의 운동 역시 어느 때보다 분주한 모습이다. 순전히 봉사와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어른 상대의 전문잡지들조차 뜻 밖으로 선전(善戰)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팽창의 조짐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사회 문화적 환경이 급속히 변화함에 따라 일반 문학과 함께 아동문학도 한동안 주춤거렸다. 최근의 변화는 과거와 거의 단층을 이룬다 싶을 정도라 얘기되는 만큼, 특히 아동문학 부문에서는 상대적으로 힘겨운 조정기를 거쳐야 했다. 지금 어른들의 그 옛날 성장 과정과 오늘날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이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는 정도라면, 어른 작가들이 주로 어린이의 체험 형태로 표현하는 아동문학은 더 없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들은 아이들로부터 냉정하게 외면되었고, 새로운 경향의 조짐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신세대 문화를 특징짓는 각종 영상 매체들에 둘러싸여 아동문학은 갈수록 위축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동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사회 문화적 환경의 변화는 동시에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는 조건과도 이어졌다. 그 하나는 교육 환경의 변화이다. 교과서에만 의존했던 학교 교육이 이른바 ‘열린 교육’으로 바뀌었고 수학능력시험과 논술에 의한 입시제도의 출현으로 어린이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한층 폭넓은 독서 활동과 연계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 활동을 뒷받침하는 경제력의 향상이다. 오늘날 어린이책 독자 연령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대부분 6, 70년대 경제개발 시대의 교육 수혜자들로서 문화 부문에 대한 관심과 지출이 남다른 연령층이다. 게다가 핵가족화의 추세에서 어린이는 점점 가정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바, 자녀에 대한 부모들의 아낌없는 ‘투자’는 어린이 책 출판시장을 크게 자극하였다.
1990년대 막바지에 이르러 한국 아동문학이 갑자기 비약하게 된 배경을 살펴볼 때, 위의 조건들을 가능케 한 좀더 근본적인 요인으로 사회 성격 자체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컴퓨터나 전자오락을 비롯한 신세대 문화가 부상함에 따라 아동문학이 곧바로 위축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는데, 거의 비슷한 신세대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한국적 특수성의 반영으로서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제약되었던 시민사회 공간의 확대가 아동문학에 비약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거쳐온 20세기 한국 아동문학은 시민사회의 미성숙 곧 불구의 근대라는 사회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남김없이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를 경과하면서 시민사회 공간이라 함직한 것들이 몰라보게 확대되었으며, 한국 아동문학은 지금 이 곳을 빠르게 점유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Ⅱ. 역량 있는 신인과 젊은 작가들의
활약
1999년은 아동문학 창작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한 해였다. 아동문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문예지가 잇달아 나오는가 하면, 각종 아동문학상이 새로 제정되면서 신인들의 활약이 무척 돋보인 한 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하는 이들은 대부분 젊은 작가들이라서 신인과 중견을 가리기가 매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저마다
자기 영역을 개척해 가는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신인과 중견을 가리는 일이 거의 의미가 없다. 창작과 관련한 1999년의 아동문학 동향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풍부한 공상성의 확대
획일적이던 사회 문화가 점차 개방적으로 바뀌는 추세에서 오늘의 작가들이 공상의 요소 또는 판타지에 눈길을
돌리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욱이 안으로 억압성을 키워온 근대의 가치가 힘을 상실하면서 근대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이른바 탈근대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기성의 가치를 주입하려는 의도에서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납작하게 눌러왔던 교훈주의 동화들은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한편으로,
요즘 어린이들의 감성에 바짝 다가선 ‘주부 작가군’이 새로운 기수로 떠올랐다. 발랄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주목받아 온 채인선은
이번에도 동화집 《그 도마뱀 친구가 뜨개질을 하게 된 사연》(창작과비평사)을 내놓아 우리 아동문학에서 그리 흔치 않은 유머와 넌센스를 한껏
맛보게 해주었다. 김옥 동화집 《학교에 간 개돌이》(창작과비평사)는 공상 그 자체보다는 현실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억압받은 아이들의 심리를
공상의 작용으로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편으로 본격 판타지를 시도한 작품들이 여럿 등장한 것은 예년에 볼 수 없었던
특징이다. 황선미의 《샘마을 몽당깨비》(창작과비평사)는 서양의 ‘마법의 성’에 대비할 수 있는 ‘도깨비 나라’를 그린 작품이다. 판타지의 형식을
가지고 옛이야기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오늘의 인간이 봉착해 있는 환경 생태의 문제를 다루었다. 박상률의 《구멍 속 나라》(시공주니어) 역시 환경
생태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복개된 청계천 하수도 속의 세계를 판타지로 그려 보였는데, 추리기법과 공상과학의 요소를 아울러 지닌 작품이다.
곽옥미의 《말박사 고장수》(시공주니어)는 제주도 조랑말을 소재로 하여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조랑말의 유래와 그 보존의 의미를 새기고
있다. 판타지 양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혼을 나누는 열림의 형식을 지향하는 면에서 생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상생(相生)의 철학을 담기에
적합하다.
원로작가 권정생은 오랜 침묵을 깨고 분단 극복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를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이 작품은 무거운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해학과 익살이 가득한 판타지로 매우 흥미로운 줄거리 전개를 보여준다.
2. 개성 있는 주인공의 창조
공상성이 풍부한 판타지가 강세를 보이고 밋밋한 생활동화나 노골적인 교훈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약세를 보이는
추세에서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충실한 개성 있는 주인공을 내세워 독자의 폭을 넓히고 있다. 이른바 말 잘 듣고 자기
희생적인 ‘천사형’ 주인공보다는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방한 성격의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동화의 대부분은 줄거리를 이어가기 위한 사건과 행동에 치중하여 인물 형상이 평면적인 한계를 적잖게 보여 왔다. 몇 가지 유형적인 성격에 고정된
우리 동화의 작중인물은 고유명사라기보다 추상적인 기호에 가까웠다. 그런데 역량 있는 젊은 작가들로부터 성격 창조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특기할 만한 현상이다.
사실 동화의 자리에서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 작가로 이금이를 꼽을 수 있다. 이 작가는 주로
장편동화를 가지고 남다른 성격 창조의 힘을 보여주었다. 《도들마루의 깨비》(시공주니어), 《너도 하늘말나리아》(푸른책들)는 아이들의 성장에
초점이 놓인 작품인데,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물의 심리 특성을 잘 살려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경실의 《나는 내가
좋아요》(푸른나무), 김향이의 《내 이름은 나답게》(사계절) 같은 작품들에서는, 평범해서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 드는, 거의 익살꾼에 가까운
개성파 주인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생활상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가는 매력적인 인물의 창조에 역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명랑동화와는 구별된다.
3. 새로운 시대 이슈의 부각
어린이들도 진공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시대의 공기를 숨쉬며 살아간다. 어린이들의 삶을 규정짓는
시대 현실의 문제들 가운데 다음 몇 가지는 근래의 작품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첫째는 이른바 IMF 환란의
반영으로 가정 경제의 파산이 몰고 온 생활상의 위기를 다룬 작품들이다. 배선자의 《아빠, 힘내세요》(사계절), 홍기의 《새가 된
아이》(시공주니어)는 부모의 실직으로 고통을 겪는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려서 희망과 격려를 전하고 있다. 이미옥의 《가만 있어도 웃는
눈》(창작과비평사), 박기범 동화집 《문제아》(창작과비평사)는 비슷한 경제 위기를 다룬 것이면서도 각각 도시 중산층과 서민층의 삶을 매우 특색
있게 반영하였다. 이미옥은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도시 ‘인텔리 엄마’의 건강한 의식을 잘 살려 냈고, 박기범은 일인칭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가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하여 소외층의 어눌하면서도 진실한 목소리를 잘 살려 냈다.
둘째는 장애아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고정욱의
《아주 특별한 우리 형》(대교)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컴퓨터 분야에서 성공한 인물을 통해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아주는 내용이며,
조은의 《꽃 속에 묻힌 집》(창작과비평사)은 형편이 여유 있는 집에서 정신박약아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아이를 외부와 차단한 채로 살게 하는데
그 집 파출부의 따뜻한 사랑의 힘으로 비인간적인 소외를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셋째는 도시 문명에 대한 반성과 생태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윤기현 동화집 《보리타작하는 날》(사계절), 우봉규의 《금이와 메눈취 할머니》(시공주니어)는 도시와는 다른 분위기의 농촌이나 산촌을
배경으로 토속적인 내음이 물씬 풍기는 삶의 체험을 전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그 자체로 생태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농촌 현실의 문제를 다룬 것도 아니다.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통해서 오늘날의 도시 문명이 잉태한 삶의 위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데에 작가의 의중이
놓여 있다. 원유순의 《콩달이에게 집을 주세요》(대교)는 댐 건설로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수달을 등장시켜 생태 환경의 문제에 직접
다가선 작품이다.
넷째는 역사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는 가운데 삶의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는 세기의
전환점에서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장문식 동화집 《멍순이》(예림당), 손연자 동화집 《마사코의 질문》(푸른책들)은 지금까지도 아픔이
지속되고 있는 근·현대사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장문식은 일제 시대 정신대의 상처, 동존 상잔의 상처, 광주민중항쟁의 상처 등을 어루만지고
있으며, 손연자는 일제의 잔혹한 탄압상과 그로부터 비롯된 의식의 굴절 등을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의 시점으로도 파헤치고 있다. 한편 강숙인의
《마지막 왕자》(푸른책들)는 화랑정신에 바탕해서 기울어 가는 국운을 되살리려는 마의태자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냈다.
4. 서정시에서 이야기시로
아동문학의 호황은 산문 영역에 국한되는 것으로, 시 부문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시인들의 활동은 주로
동인지나 문예지를 통해서 근근히 맥을 이어가는 형편이다. 이런 중에도 이미옥 동시집 《아빠 자전거에 우리 동네를 태우고》(문원)가 나왔는데 요즘
아이들의 의식과 감각에 맞추려는 시도가 엿보이고는 있지만 시단의 활성화를 위한 적극적인 돌파구는 되지 못했고, 오히려 시골 분교 아이들의 소박한
작품들을 엮은 김용택의 《학교야, 공 차자》(보림)와 같은 일련의 시도들이 환영을 받았다. 노래운동가 백창우는 기왕에 나온 전래동요와 창작동요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동요보급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9년의 동시단에서 얼른 눈에 띄는 사실은 장르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은 ‘이야기 시집’이 무려 세 권이나 나와서 호평 받은 점이다. 권영상의 《신발코 안에는 새앙쥐가 산다》(문원)와
《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재미마주), 위기철의 《신발 속에 사는 악어》(사계절)가 그것들이다. 이 시집들은 공통적으로 뛰어난 상상력과 넌센스의
요소를 활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오늘을 사는 아이들의 취향을 고려한, 시의 대중화를 위한 적극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권영상은 어린이를 서정적 자아로 삼아 어린이 특유의 비약과 재치를 맛보게 해주었고, 위기철은 들려주는 방식의 화법으로 옛이야기의
해학을 맛보게 해주었다.
Ⅲ. 저학년 동화의 약진, 또는 고학년 동화와 청소년문학의 경계
지우기
그림책과 삽화 부문이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고 있고, 책의 꼴이
한층 세련되어 가는 추세에 발맞춰 다양한 판형의 저학년 동화 시리즈물이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거의 모든 출판사에서 저학년 동화 시리즈물을
다투어 기획하고 나서는 통에 이 현상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시리즈물은 그림책과 동화책의 중간 형태인데, 줄거리 전개에서
공상의 요소를 살려 쓴다든지, 아이들 눈높이에 충실한 개성적인 인물을 등장시킨다든지 하는 작품 경향을 부추기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한 채인선의 《그 도마뱀 친구가 뜨개질을 하게 된 사연》, 김옥의 《학교에 간 개돌이》를 포함해서 김영주의 《짜장 짬뽕 탕수육》(재미마주),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표》(웅진), 어린이문학협의회 편 《왕땅콩 갈비 게으름이 욕심쟁이 봉식이》(우리교육) 같은 것들은 작품 제목에서부터 이런
경향을 한 눈에 알아보게 해준다.
한편, 최근의 창작물은 아니지만 유명 소설가들의 대표작 가운데 어린이들이 소화할 수 있는
소설들을 가려 뽑아서 선명한 이미지의 삽화와 함께 내놓은 기획물이 등장하여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고 있다. 황순원 작품 모음 《소나기》, 김유정
작품 모음 《봄봄》, 김동리 작품 모음 《농구화》, 이효석 작품 모음 《메밀꽃 필 무렵》, 박완서 작품 모음 《자전거 도둑》을 내놓은
다림출판사의 빛문고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주로 주인공이 아이들이거나 작품 소재가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선택되었다. 이 시리즈물은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을 독자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그 동안 은연 중에 초등학생으로 제한되어 온 아동문학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아동문학은 본래 청소년문학을 포함하는 개념이었고, 외국의 경우에도 아동문학은 그렇게 범위가 설정되어 있다. 머지 않아 이와 같은 확충된
범위에 걸맞은 창작물이 새롭게 쏟아져 나온다면 이 흐름은 저학년 동화의 발전보다 훨씬 의미 있는 아동문학의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판단된다.
Ⅳ. 한국 판타지의 가능성―신화·전설·민담의
재창조
판타지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창작물뿐 아니라 신화·전설·민담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이미 판타지는 공급과 수요라는 면에서 성인 독서시장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각 매체에 익숙한 요즘 세대는 까다로운
책읽기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원시원한 사건 전개를 보이는 판타지를 더욱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오늘날의
판타지 현상은 기본적으로는 근대의 지배적인 가치체계를 뛰어넘으려는 새로운 요구와 모색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자연과 신비의 영역에 대한
무자비한 정복을 감행해온 이성만능주의라든지 시공간을 자본의 통제 아래 유폐시킨 근대를 넘어서는 방법의 하나로 ‘모든 존재에 말 걸기’로서의
판타지가 주목되는 것이다.
성인 독서물로서의 판타지는 주로 중세 영웅담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아동물은 본디 출발부터가
옛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신화·전설·민담의 재창조에 더 초점이 모아진다. 민담의 일부는 오래 전부터 전래동화의 이름으로 재창조되어 왔던
것이 다시 주목받고 있고 신화는 최근 들어 새롭게 발굴 정리되고 있는데, 무가(巫歌)의 형태로 전하는 것들은 구전 과정에서 신화의 흔적만 남기고
전설 또는 민담화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긴 해도 신화의 뿌리를 지닌 것들은 사건 전개에 있어서 민담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곧 창세신화나
서사무가의 본풀이에 토대를 둔 이야기들은 존재의 근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어서는 장대한 규모의
상상력을 거침 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는 토착 신앙과 결부된 자연관이나 인간관 등 민족적 특성이 녹아 들어가 있다. 본격적인 창작 판타지가
드문 우리 형편에서 신화나 전설을 재창조하는 작업은 한국 판타지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매우 값진 시도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사계절출판사에서 ‘마르지 않는 옛이야기 샘’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첫선을 보인 《세상이 생겨난 이야기》 이후로 창세신화를 재창조한 시리즈물이
연이어 나왔다. 한겨레신문사에서는 《이 세상 맨 처음 이야기소별왕 대별왕》, 《저승세계를 찾아간 소녀-바리공주》, 《인간 소녀와 하늘
도령의 사랑자청비와 문도령》, 《서천꽃밭의 꽃대왕한락궁이》, 《염라대왕과 저승사자강림도령》을 펴냈고,
창작과비평사에서는 《삼신할머니와 아이들》, 《염라대왕을 잡아라》를, 그리고 웅진출판사에서는 《하늘과 땅이 갈라져 헤어진 이야기》를 펴냈다.
이것들은 리듬이 있는 입말체로 씌어졌고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천연색 그림들이 곁들여 있어 저학년부터 읽기에 부담이 없다.
Ⅴ. 과거 일세기에 대한 정리와
반성
방정환 탄생 백주년 기념의 해에 즈음하여, 또한 새 천년을 준비하는 시기와도 연관되어
1999년에는 과거 일세기를 정리하고 반성하려는 움직임이 자못 활발하였다. 아동문학 분야는 자료조차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라 연구와
비평 역시 부진을 면치 못해 왔다. 특히 월북 문인의 작품에 대해서는 일반 문학과 견줄 때 거의 미답(未踏)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하고 월북·실종 문인들의 작품을 포함해서 한국동란까지의 동화와 동시를 새롭게 가려 뽑은
겨레아동문학선집(겨레아동문학연구회 엮음, 전10권, 보리출판사)의 출간은 시기적으로 늦었어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만한 성과였다. 수록된
작품의 반수 이상이 새로 발굴한 것들인 데다가 엄밀한 비평적 시각으로 주요 작가와 작품을 선별했기 때문에,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대표작
선집으로서 우선 의의가 있겠지만 아동문학의 연구자들한테도 중요한 자료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구와 비평
분야에서는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는 5월에 방정환 문학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이
자리에서 이재복은 <새로 만나는 방정환 문학 암곡소파 문학과 견주어 보기>(어린이문학, 5월호, 6월호)를 발표하였다. 이
글은 한국 아동문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이와야 사나나미(巖谷小波)가 걸어간 길을 거의 고스란히 되밟아 가면서 이 땅에 동심주의 아동문학의
씨앗을 뿌린 방정환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원종찬은 <‘한일 아동문학의 기원에 관한
비교연구’를 위하여>(어린이문학, 11월호, 12월호)를 발표하여, 방정환에서 본격 출발을 보인 한국 아동문학은 천도교의 개혁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식민지 근대와 대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을 받긴 했어도 이와야 사자나미 류의 입신출세주의는 물론이고
<빨간새(赤の鳥)> 류의 동심주의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사회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교훈주의와 동심주의가 분단시대 한국
아동문학의 지배담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남북한 제도권 아동문학이 각각 일제 시대의 주류 아동문학을 이단시하고 왜곡해온
탓이라는 지적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뿐 아니라 앞날을 내다보는 일도 함께 이루어졌다. 현대아동문학작가회에서 펴낸
「아동문학담론」 5권은 <21세기 아동문학의 전망과 과제>라는 특집을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용희는 <디지털시대의
아동문학>을 발표하였고, 최지훈은 <아동문학의 새로운 이해>를 발표하였다. 김용희는 정보화 시대에 우리 아동문학이 직면한 공통의
과제를 상기시키면서 표현론과 반영론으로 대립해 온 기존 패러다임이 ‘교류와 화합’으로 융화될 것을 촉구했고, 최지훈은 그 동안 문단의 변방으로
밀려나온 아동문학이 더욱 높은 질의 보편성으로 자기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용희는 연초에 아동문학 평론집 《동심의 숲에서 길
찾기》(청동거울)를 펴내기도 했는데, 이는 척박한 아동문학 비평계를 자극하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문인단체에 소속하지 않거나 소속했어도 그 구심력과 관계없이 활동하는 주요 문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한층 발이 빨라진
출판사와 직접 통로를 가지고 창작에 열중한다. 문인들이 단체 활동을 기피하는 추세는 현시대의 특성인 개인주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성 문단의 고루한 편견과 타성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가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20세기의 특수 산물인 파벌 지향의 중앙집권형
문인단체들을 쇄신하는 일과 관련해서 새로운 희망일 수가 있다. 1999년의 아동 문단은 ‘분열과 대립의 시대’에서 ‘화해와 공존의 시대’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출판 시장의 확대에 힘입어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한 한국 아동문학이,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가운데 실질적인 도약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앞으로의 활동이 주목된다.
◎筆者 : 원종찬/아동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