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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금애기-아기의 신, 삼신 할머니
세이레
2006. 4. 6. 01:46
아래 이야기 또한 한겨레 옛이야기 시리즈(한겨레신문사 1999~)의 초안으로서 작성된 것입니다. 전국 여러곳에서 전승되는 서사무가
제석본풀이(당금애기)의 내용을 상상력을 보태어 조합하여 읽기 쉽게 재정리한 것이지요. 이 신화는 흔히 '제석신'의 내력담으로 전승되는데,
아래에서는 '삼신'과 '산신'의 내력담으로 돼있는 자료의 내용을 따랐습니다.
** 당금애기 - 아기의 신, 삼신할머니
소별왕이 널리 인간세상을 다스리다가 떠난 후 세상에는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륙 서편에 서역국이 생기고 남쪽 한편에 천축국이 생겼다. 천축국 동쪽 지금의 중국 땅에는 강남국이 자리잡았다.
소별왕 대별왕이 태어난 한반도 땅의 중앙에는 해동국이 북쪽에 불라국이 생겼다. 해동국에 속한 남해 제주섬에는 동경국과 주년국 같은 소국들이 자리잡았다.
이때 하늘나라 신하 가운데 시준님이 유난히 인간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세상에 내려가서 처녀와 결혼하여 자식을 퍼뜨리기를 소원하였다.
시준님이 거듭 상제님에게 인간세상에 내려보내 줄 것을 청하니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좋다. 그러나 인간세상에 내려가면 설사 배필을 만나더라도 십년간을 혼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시준님이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을 멀리 내려다보니, 가장 아름다운 곳이 해동국 금강산이었다.
시준님은 구름을 타고 금강산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에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에 암자를 지어놓고 스님 행세를 하기로 하였다. 머리를 깎고는 몸에 장삼을 걸치고 목에 염주를 걸었다. 손에는 쇠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시주를 받을 자루를 짊어졌다.
그 모습으로 시준님은 세상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날마다 바뀌는 낮과 밤, 계절 따라 변하는 산과 물의 모습, 서로 사랑하고 다투며 행복과 고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해동국에서 시작하여 불라국, 강남국, 천축국을 거치면서 인간세상 곳곳을 돌아보던 시준님의 발길이 서역국에 이르렀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하던 차에 문득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스쳐들었다.
"당금애기란 처자가 그렇게 예쁘다면서."
"아무련. 마음도 그렇게 착하다는구먼."
"그나저나 소문만 있지 본 사람이 없다는 걸."
"구중심처 깊은 곳에 사는데 어찌 보겠어."
시준님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물어 당금애기 집에 다다랐다.
과연 듣던 대로 보통 집이 아니었다. 집채가 대궐처럼 커다란데 담장이 세 길 높이로 둘러쳐져 있고 대문이 꼭꼭 닫혀 있었다. 그런 대문이 열두개란다.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기는 쥐라도 감히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였다.
시준님이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무 관세음보살. 시주를 청하러 왔으니 문을 열어주세요."
때 마침 당금애기 집에는 어른도 없고 남자도 없었다.
당금애기의 부모는 오라비들은 하늘나라에까지 재주가 알려진 일꾼들이었다. 당금애기 아버지는 천하국 공사를 돌보러 가고, 어머니는 지하국 공사를 돌보러 갔으며, 아홉 오라비들은 나라일을 돌보러 가 있었다.
하인들이 또한 따라간지라 집에는 당금애기와 몸종 명산군, 옥단춘만 남아 있었다.
당금애기는 옥단춘과 함께 방안에서 수를 놓고 있고, 명산군은 바깥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가 없어 졸고 있던 명산군이 시준님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당금애기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웬 스님이 시주를 청하러 왔나 봐요. 어떡할까요?"
"집안에 어른이 없으니 어떤단 말이냐? 모른척 할밖에. 살짝 엿보다가 스님이 돌아가거든 말해 다오."
대문 앞에서 몇번을 불러도 기척이 없자 시준님은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와그랑창창 소리가 나며 대문이 열렸다. 엿보던 명산군이 깜짝 놀라서 얼른 다음 문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갔다.
그러나 그 문 또한 시준님의 신력을 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열두 대문이 다 열리고 마침내 시준님은 당금애기 처소 앞에 당도하여 섰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니, 여기는 나는 새도 못 들어오고 기는 쥐도 못 들어오는 곳인데 웬 염불소리란 말이냐. 옥단춘아, 어서 나가 보아라."
옥단춘이 나가보니 웬 스님이 목탁을 들고 서 있고, 한편에 명산군이 놀란 눈으로 목을 움츠리고 서있었다. 옥단춘이 말했다.
"아니 스님, 여기가 어딘데 들어오셨단 말씀입니까?"
시준님은 그 말은 못 들은 척 당금애기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당금애기는 밖에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말이 그치자 궁금증이 나서 살짝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왠지 마음을 끄는 신비한 분위기의 스님 한 분이 그린 듯이 단정하게 서 있었다. 그 스님의 눈이 당금애기의 눈과 마주쳤다. 당황한 당금애기.
시준님이 말했다.
"당금애기님, 문안 드립니다. 부처님께 올릴 백미 동냥을 왔으니 부디 거절하지 마세요."
당금애기가 무엇엔가 이끌린 듯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 밖으로 나갔다. 시준님께 공손히 합장을 드리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마침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모두 멀리 일을 하러 나가서 안 계시고 곳간마다 문이 잠겨 있습니다. 그러니 저로선 어찌할 수가 없군요. 용서하세요."
그 말을 들은 시준님이 한 손에 짚고 있던 쇠지팡이를 하늘로 향하고 왼발로 땅을 세 번 굴렀다. 그러자 꼭꼭 닫혀 있던 곳간문이 거짓말처럼 스르렁 덜컹 열렸다.
놀란 당금애기가 말했다.
"스님, 어떤 쌀로 드릴까요? 아버지가 드시던 쌀을 드릴까요?"
"그 쌀은 땀내가 나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드시던 쌀을 가져가시지요."
"그 쌀은 비린내가 나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홉 오라버니가 먹던 쌀을 드리겠습니다."
"그 쌀은 땀내가 나고 사람내도 나서 못 받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어떤 쌀을 달란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 말고 바로 당금애기님이 드시던 쌀로 손수 서 말 서 되 서 홉을 시주하시면 소승이 정성껏 부처님께 올리겠습니다."
당금애기는 할수없이 광 속으로 들어가 자기 쌀독을 열고 아래쪽의 깨끗한 쌀로 서 말 서 되 서 홉을 떴다. 그리고는 시준님의 동냥 자루에 조심스레 쏟아 부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자루 밑바닥이 터져 있어 쌀이 모두 땅바닥으로 흘러 흙바닥 위에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딱한 스님요. 어찌 밑 빠진 자루를 가지고 동냥을 다니십니까?"
그러면서 당금애기는 빗자루로 쌀을 쓸어 모으려 하였다.
"안 됩니다, 당금애기님. 부처님께 올릴 쌀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안 됩니다. 뒷동산 싸리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서 하나하나 주워 담아 주세요."
당금애기는 먼저 바늘과 실을 꺼내 손수 시준님의 동냥자루를 기웠다. 그리고 시준님의 말씀대로 뒷동산 싸리나무를 꺾어다가 젓가락을 만들어 땅에 떨어진 쌀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정성스레 쌀을 줍는 당금애기의 모습은 참으로 고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준님의 눈가에 그윽한 미소가 맴돌았다.
실은 시준님이 당금애기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자루를 찢어놓았던 것이었다.
서 말이 넘는 쌀을 하나하나 주워 담다 보니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쌀을 미처 다 줍지 못하여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말았다.
쌀이 딱 세 톨이 남았을 때였다. 시준님은 당금애기의 섬섬옥수 같은 고운 손을 잡아서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손수 쌀 세 톨을 집어 들었다. 입김을 불어 쌀에 묻은 흙을 털어낸 다음 그 쌀을 당금애기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쌀을 드시면 집안에 큰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당금애기는 제비 같은 손으로 그 쌀 세 톨을 받아서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시준님의 눈가에 다시 그윽한 미소가 스쳤다.
그날 밤, 잠을 자던 당금애기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오른쪽 어깨에 달이 돋아 보이고 왼쪽 어깨에 해가 돋아 보였다. 또 빛나는 별 세 개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고 구슬 세 낱이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잠에서 깨어 눈을 떴는데도 꿈속의 일이 마치 생시의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머리속에서 영 떠나지를 않았다.
날이 밝아오자 당금애기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시준님이 하직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당금애기가 말했다.
"스님요. 제가 간 밤에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풀이를 해주시고 가세요."
당금애기로부터 꿈 이야기를 들은 시준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꿈은 자식을 점지 받는 꿈이랍니다. 이제 귀한 아들을 셋이나 낳게 될 것입니다."
당금애기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니 스님,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아이라니요?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아이들은 하늘이 아는 귀한 아이들이니 잘 키워야 합니다. 이제 제가 박씨를 세 개 드릴테니 잘 간직하셨다가 아이들이 크거든 전해 주세요. 그러면 저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부디 평안하시길……."
그 말과 함께 시준님은 갑자기 표연히 길을 나섰다.
놀란 당금애기가 급히 뒤를 따랐지만 스님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날이 가고 달이 갔다.
천하국과 지하국에 일을 갔던 당금애기의 부모님과 나라에 일을 갔던 오라버니들이 다 돌아왔다.
그런데 당금애기에게는 큰 걱정이 생겼다. 갑자기 밥에서 비린내가 나고 물에서 흙내가 나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개살구나 능금 같은 신 것만 자꾸 먹고 싶었다. 그러더니 달이 더해 갈수록 배가 자꾸만 불러왔다.
시준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당금애기는 부끄럽고 무서운 마음에 애써 아이 가진 기색을 숨기려 했지만 끝까지 식구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시준님과 만난 지 열 달이 다 돼가던 어느 날, 마침내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그 사실을 알고 말았다. 당금애기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노발대발하였다.
"우리가 너를 믿었더니, 네가 어찌 이런 부정한 일로 집안 망신을 시킨단 말이냐?"
당금애기는 시준님과의 일을 사실대로 말하였지만,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그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했다.
"네가 아이를 낳아 집안 망신을 시키느니 차라리 너 하나 죽어 없어지는 것이 옳은 일이다."
오라버니들은 칼을 꺼내 당금애기를 찌르려 하였다. 참으로 끔찍한 순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갑자기 칼자루가 뚝 부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오라버니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당금애기를 죽이려는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집안 망신을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때 뒷전에서 눈물을 머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금애기의 어머니가 보다 못해 당금애기를 구하러 나섰다. 치마로 당금애기를 감싸며 아홉 형제에게 말했다.
"얘들아. 이 아이의 옳고 그름은 하늘이 알 일이로구나. 이렇게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 저 뒷동산에 돌함에 있으니 거기에 갖다 넣어 보자꾸나. 죄가 없으면 하늘이 살리고 죄가 있으면 하늘이 알아서 벌을 내릴 터이니 그게 옳지 않겠니?"
아홉 형제는 어머니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그들은 솔개가 병아리를 채듯 당금애기를 훌쩍 채 가지고 뒷동산으로 길을 나섰다.
"아이고 어머니. 나는 가오, 나는 가오."
당금애기가 이렇게 울부짖자 어머니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고 얘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딸을 못 낳아서 그리 애를 태우다가 너를 낳아가지고 이렇게 보낸단 말이냐? 아이고, 난 못 하겠다."
그렇지만 아홉 형제는 애써 들은 체를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뒷동산에 오른 형제는 당금애기를 돌함 속에 집어넣고서 돌뚜껑을 닫아 덮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푸른 하늘에서 난데없는 천둥 벼락이 쳐대면서 흙비와 돌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홉 형제의 발바닥이 땅에 딱 달라붙어 버린 것이다. 형제들이 있는 힘을 다 써보았지만 발은 좀체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당금애기를 죽이려 한 아홉 형제는 그 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발이 떨어졌다고 한다.)
당금애기를 떠나보내고 나서 슬픔에 잠겨 눈물을 훔치고 있던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푸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뒷동산에 한바탕 흙비와 돌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난데없는 비라니. 혹시 우리 당금애기가 죽어 하늘에 올라가면서 눈물비를 흘리는 게 아닐까?'
어머니는 당금애기의 주검이라도 마지막으로 보려고 급히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돌함을 부여안고서 소리쳤다.
"아가, 내 딸 아가. 살았느냐, 죽었느냐? 제발 말 좀 해다오."
어머니가 애타게 두 번 세 번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어머니는 딸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그때였다. 돌함 속에서 모기 소리 만하게 아이 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해서 점점 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함 뚜껑이 덜거덕 열리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귀여운 세 쌍동이 사내아이가 당금애기 품에서 울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푸르고 흰 학 세 마리가 아이들을 날개로 감싸 주고 있었다.
당금애기가 어머니를 보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머니, 이 아이들을 장차 어찌 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죽고만 싶습니다."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걱정 말거라. 내가 너희 모자를 지켜 주겠다."
어머니는 당금애기와 세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후원 별당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 곳에서 지내게 하였다.
당금애기가 처녀의 몸으로 한꺼번에 세 아이를 기르자니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두 아이에게 젖을 주면 꼭 한 아이가 울었다.
"아가, 울지 마라. 우리한테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찾아올 거야."
이렇게 아이를 달랬지만, 실은 당금애기도 속으로 아이와 함께 울고 있었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니 그 재주와 마음 씀씀이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불쌍한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그리고 글을 배우는데 서로 도우며 밤낮으로 공부하니 다른 아이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받아 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여전히 이들을 남 보듯이 하였다. 그리고 삼형제의 재주를 시샘한 다른 아이들이 형제를 따돌리면서 욕을 해대곤 했다.
"이 홀에미 자식들아. 저리 썩 꺼져라."
"애비가 없으면 병신이랜다."
삼형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픔이 뼛속까지 파고 들었다. 그렇지만 행여 어머니가 슬퍼할까봐 내색을 하지 않고 꾹 참았다.
그렇지만 어린 형제들이 고통을 한없이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 또 다시 친구들로부터 심한 놀림을 당한 삼형제는 마침내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고서 참아 왔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서러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제발 아버지를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당금애기는 울고 있는 아이들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얘들아, 울지 마라. 너희 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시란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이만큼 컸으니 아버지를 찾을 때가 된 것 같구나."
당금애기는 비로소 시준님에 얽힌 사연을 세 아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는 고이 간직해 두었던 박씨 세 개를 꺼내 삼형제에게 주었다.
삼형제는 뛸뜻이 기뻐하면서 뒤뜰에 박씨를 심었다.
다음날이었다. 삼형제가 심은 박씨는 하룻밤 사이에 벌써 싹이 나서 덩굴이 쭉쭉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삼형제는 급히 가마를 마련하여 어머니를 태운 다음 그 박덩굴 뻗는 방향을 따라서 길을 나섰다.
당금애기 집에서 나온 박덩굴은 하염없이 뻗어 나갔다. 그 박덩굴을 따라잡으려니 형제들은 거의 잠을 자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금애기가 안쓰러운 마음에 거듭 가마를 두고 가자고 하였지만 삼형제는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박덩굴은 과연 어디로 뻗어 나갔을까? 그 덩굴이 향한 곳은 한반도였다. 불라국 백두산을 거쳐서 해동국 묘향산과 계룡산, 지리산과 태백산을 감돌고 대관령을 넘어 설악산을 지나 금강산에 이르렀다.
금강산에 이른 박덩굴은 일만 이천 봉 아름다운 봉우리를 두루 감돌며 점점 깊은 산속으로 뻗어 들어갔다. 그 한 골짜기에 암자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박덩굴은 그 절로 뻗어 가더니 절을 둥그렇게 감싸 안았다.
그 절에는 한 스님이 그린 듯이 앉아서 맑은 목소리로 불경을 외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가마에 타고 있던 당금애기가 들으니 낯설지가 않았다. 오래 전 어느 날 자기 집에 와서 시주를 청하던 바로 그 스님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애타게 그리워하며 꿈마다 보던 시준님이었다.
당금애기는 가마에서 내려 말없이 시준님을 향해 합장을 드렸다.
당금애기를 발견한 시준님이 목탁을 두드리던 손을 놓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하셨구려.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허나 이게 다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으니 어찌하겠오."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당금애기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모습을 본 삼형제가 시준님에게 달려들어 소리를 쳤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시죠?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그러자 시준님이 짐짓 얼굴빛을 엄하게 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내 아들이라고? 믿을 수 없다. 만약 내 자식이라면 종이로 버선을 만들어 신고 저 냇물을 건너갔다 와 보거라. 버선에 물이 묻어서는 안된다."
삼형제는 시준님의 말씀대로 종이 버선을 만들어 신고 강을 건너갔다 왔다. 과연 그 버선에는 물이 한방울도 묻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내 아들이라 할 수 없다. 저 뒷동산에 올라가서 죽은 지 삼 년이 된 소뼈를 주워 살아 있는 소로 만들어 거꾸로 타고 오거라."
삼형제는 다시 스님이 시킨 대로 했다. 삼형제가 타고 온 말이 '음메'하고 울었다.
"그래, 꽤 재주가 있구나. 그렇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이번엔 짚으로 닭을 만들어 살아 움직이도록 해 보거라."
삼형제는 다시 시준님의 말씀대로 짚으로 닭을 만들었다. 닭이 완성되자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면서 커다랗게 '꼬끼오' 하고 울었다. 삼형제가 말했다.
"아버지, 이래도 저희들이 아버지 자식이 아닙니까?"
"아직도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합쳐 봐야만 내 자식인지 알 수가 있다."
삼형제는 시준님의 말대로 동이를 갖다 놓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었다. 그러자 삼형제의 피가 안개구름처럼 몽실몽실 퍼져 똘똘 뭉쳤다. 다시 시준님이 자기 손가락의 피를 동이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그 피 또한 안개구름처럼 퍼져 삼형제의 피에 한데 합쳐졌다.
"오냐, 너희들은 내 자식이 분명하다.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시준님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삼형제는 아버지 품에 안겨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한참이 지나 마음을 진정한 다음 맏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저희는 그 동안 이름도 없이 박대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 형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오냐. 맏이 네 이름은 태산이라고 하고 둘째는 한강, 셋째는 평택이라고 하자꾸나. 평생을 가도 태산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한강 물이 마르지 않고 평택의 땅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내와 세 아들을 만난 시준님은 꼭 십년 만에 스님 행세를 그만두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한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고 고락을 함께 하며 행복한 삶을 누렸다.
지난 잘못을 뉘우친 당금애기의 오라버니들과 부모가 다녀가곤 하였다.
당금애기의 세 아들은 나라에서 재주를 아껴 벼슬을 내리는 것을 마다하고 지난날의 자신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평생을 살았다. 많은 아이들을 낳아서 훌륭히 길러낸 삼형제는 부모가 돌아가신 삼년 후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옥황상제는 하늘나라로 돌아온 시준님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허허허, 할아버지가 돼서 돌아왔군. 그래, 인간세상 살이가 어떠하던고?"
시준님은 옥황상제에게 인간세상에서의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어허, 그대 말을 들으니 인간세상의 재미가 천상에 못지 않구려. 그나저나 당금애기와 삼형제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가히 신이 될 자격이 있도다. 내 그들을 신으로 삼으리라."
옥황상제는 당금애기의 세 아들을 해동국 산신령으로 점지하여 사람들을 돌보게 하였다. 맏이는 금강산 신령으로, 둘째는 태백산 문수신으로 삼았다. 막내는 대관령 당산의 서낭신이 되었다.
옥황상제는 또한 힘들게 세 아들을 낳아서 훌륭히 키운 당금애기의 공을 기려 그를 삼신으로 삼았다. 아이 없는 집에 아이를 점지하고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돌봐준다는 삼신 할머니가 바로 이분인 것이다.
** 당금애기 - 아기의 신, 삼신할머니
소별왕이 널리 인간세상을 다스리다가 떠난 후 세상에는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륙 서편에 서역국이 생기고 남쪽 한편에 천축국이 생겼다. 천축국 동쪽 지금의 중국 땅에는 강남국이 자리잡았다.
소별왕 대별왕이 태어난 한반도 땅의 중앙에는 해동국이 북쪽에 불라국이 생겼다. 해동국에 속한 남해 제주섬에는 동경국과 주년국 같은 소국들이 자리잡았다.
이때 하늘나라 신하 가운데 시준님이 유난히 인간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세상에 내려가서 처녀와 결혼하여 자식을 퍼뜨리기를 소원하였다.
시준님이 거듭 상제님에게 인간세상에 내려보내 줄 것을 청하니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좋다. 그러나 인간세상에 내려가면 설사 배필을 만나더라도 십년간을 혼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시준님이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을 멀리 내려다보니, 가장 아름다운 곳이 해동국 금강산이었다.
시준님은 구름을 타고 금강산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에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에 암자를 지어놓고 스님 행세를 하기로 하였다. 머리를 깎고는 몸에 장삼을 걸치고 목에 염주를 걸었다. 손에는 쇠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시주를 받을 자루를 짊어졌다.
그 모습으로 시준님은 세상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날마다 바뀌는 낮과 밤, 계절 따라 변하는 산과 물의 모습, 서로 사랑하고 다투며 행복과 고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해동국에서 시작하여 불라국, 강남국, 천축국을 거치면서 인간세상 곳곳을 돌아보던 시준님의 발길이 서역국에 이르렀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하던 차에 문득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스쳐들었다.
"당금애기란 처자가 그렇게 예쁘다면서."
"아무련. 마음도 그렇게 착하다는구먼."
"그나저나 소문만 있지 본 사람이 없다는 걸."
"구중심처 깊은 곳에 사는데 어찌 보겠어."
시준님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물어 당금애기 집에 다다랐다.
과연 듣던 대로 보통 집이 아니었다. 집채가 대궐처럼 커다란데 담장이 세 길 높이로 둘러쳐져 있고 대문이 꼭꼭 닫혀 있었다. 그런 대문이 열두개란다.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기는 쥐라도 감히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였다.
시준님이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무 관세음보살. 시주를 청하러 왔으니 문을 열어주세요."
때 마침 당금애기 집에는 어른도 없고 남자도 없었다.
당금애기의 부모는 오라비들은 하늘나라에까지 재주가 알려진 일꾼들이었다. 당금애기 아버지는 천하국 공사를 돌보러 가고, 어머니는 지하국 공사를 돌보러 갔으며, 아홉 오라비들은 나라일을 돌보러 가 있었다.
하인들이 또한 따라간지라 집에는 당금애기와 몸종 명산군, 옥단춘만 남아 있었다.
당금애기는 옥단춘과 함께 방안에서 수를 놓고 있고, 명산군은 바깥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가 없어 졸고 있던 명산군이 시준님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당금애기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웬 스님이 시주를 청하러 왔나 봐요. 어떡할까요?"
"집안에 어른이 없으니 어떤단 말이냐? 모른척 할밖에. 살짝 엿보다가 스님이 돌아가거든 말해 다오."
대문 앞에서 몇번을 불러도 기척이 없자 시준님은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와그랑창창 소리가 나며 대문이 열렸다. 엿보던 명산군이 깜짝 놀라서 얼른 다음 문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갔다.
그러나 그 문 또한 시준님의 신력을 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열두 대문이 다 열리고 마침내 시준님은 당금애기 처소 앞에 당도하여 섰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니, 여기는 나는 새도 못 들어오고 기는 쥐도 못 들어오는 곳인데 웬 염불소리란 말이냐. 옥단춘아, 어서 나가 보아라."
옥단춘이 나가보니 웬 스님이 목탁을 들고 서 있고, 한편에 명산군이 놀란 눈으로 목을 움츠리고 서있었다. 옥단춘이 말했다.
"아니 스님, 여기가 어딘데 들어오셨단 말씀입니까?"
시준님은 그 말은 못 들은 척 당금애기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당금애기는 밖에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말이 그치자 궁금증이 나서 살짝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왠지 마음을 끄는 신비한 분위기의 스님 한 분이 그린 듯이 단정하게 서 있었다. 그 스님의 눈이 당금애기의 눈과 마주쳤다. 당황한 당금애기.
시준님이 말했다.
"당금애기님, 문안 드립니다. 부처님께 올릴 백미 동냥을 왔으니 부디 거절하지 마세요."
당금애기가 무엇엔가 이끌린 듯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 밖으로 나갔다. 시준님께 공손히 합장을 드리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마침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모두 멀리 일을 하러 나가서 안 계시고 곳간마다 문이 잠겨 있습니다. 그러니 저로선 어찌할 수가 없군요. 용서하세요."
그 말을 들은 시준님이 한 손에 짚고 있던 쇠지팡이를 하늘로 향하고 왼발로 땅을 세 번 굴렀다. 그러자 꼭꼭 닫혀 있던 곳간문이 거짓말처럼 스르렁 덜컹 열렸다.
놀란 당금애기가 말했다.
"스님, 어떤 쌀로 드릴까요? 아버지가 드시던 쌀을 드릴까요?"
"그 쌀은 땀내가 나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드시던 쌀을 가져가시지요."
"그 쌀은 비린내가 나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홉 오라버니가 먹던 쌀을 드리겠습니다."
"그 쌀은 땀내가 나고 사람내도 나서 못 받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어떤 쌀을 달란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 말고 바로 당금애기님이 드시던 쌀로 손수 서 말 서 되 서 홉을 시주하시면 소승이 정성껏 부처님께 올리겠습니다."
당금애기는 할수없이 광 속으로 들어가 자기 쌀독을 열고 아래쪽의 깨끗한 쌀로 서 말 서 되 서 홉을 떴다. 그리고는 시준님의 동냥 자루에 조심스레 쏟아 부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자루 밑바닥이 터져 있어 쌀이 모두 땅바닥으로 흘러 흙바닥 위에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딱한 스님요. 어찌 밑 빠진 자루를 가지고 동냥을 다니십니까?"
그러면서 당금애기는 빗자루로 쌀을 쓸어 모으려 하였다.
"안 됩니다, 당금애기님. 부처님께 올릴 쌀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안 됩니다. 뒷동산 싸리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서 하나하나 주워 담아 주세요."
당금애기는 먼저 바늘과 실을 꺼내 손수 시준님의 동냥자루를 기웠다. 그리고 시준님의 말씀대로 뒷동산 싸리나무를 꺾어다가 젓가락을 만들어 땅에 떨어진 쌀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정성스레 쌀을 줍는 당금애기의 모습은 참으로 고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준님의 눈가에 그윽한 미소가 맴돌았다.
실은 시준님이 당금애기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자루를 찢어놓았던 것이었다.
서 말이 넘는 쌀을 하나하나 주워 담다 보니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쌀을 미처 다 줍지 못하여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말았다.
쌀이 딱 세 톨이 남았을 때였다. 시준님은 당금애기의 섬섬옥수 같은 고운 손을 잡아서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손수 쌀 세 톨을 집어 들었다. 입김을 불어 쌀에 묻은 흙을 털어낸 다음 그 쌀을 당금애기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쌀을 드시면 집안에 큰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당금애기는 제비 같은 손으로 그 쌀 세 톨을 받아서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시준님의 눈가에 다시 그윽한 미소가 스쳤다.
그날 밤, 잠을 자던 당금애기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오른쪽 어깨에 달이 돋아 보이고 왼쪽 어깨에 해가 돋아 보였다. 또 빛나는 별 세 개가 입으로 날아 들어오고 구슬 세 낱이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잠에서 깨어 눈을 떴는데도 꿈속의 일이 마치 생시의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머리속에서 영 떠나지를 않았다.
날이 밝아오자 당금애기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시준님이 하직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당금애기가 말했다.
"스님요. 제가 간 밤에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풀이를 해주시고 가세요."
당금애기로부터 꿈 이야기를 들은 시준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꿈은 자식을 점지 받는 꿈이랍니다. 이제 귀한 아들을 셋이나 낳게 될 것입니다."
당금애기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니 스님,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아이라니요?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아이들은 하늘이 아는 귀한 아이들이니 잘 키워야 합니다. 이제 제가 박씨를 세 개 드릴테니 잘 간직하셨다가 아이들이 크거든 전해 주세요. 그러면 저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부디 평안하시길……."
그 말과 함께 시준님은 갑자기 표연히 길을 나섰다.
놀란 당금애기가 급히 뒤를 따랐지만 스님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날이 가고 달이 갔다.
천하국과 지하국에 일을 갔던 당금애기의 부모님과 나라에 일을 갔던 오라버니들이 다 돌아왔다.
그런데 당금애기에게는 큰 걱정이 생겼다. 갑자기 밥에서 비린내가 나고 물에서 흙내가 나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개살구나 능금 같은 신 것만 자꾸 먹고 싶었다. 그러더니 달이 더해 갈수록 배가 자꾸만 불러왔다.
시준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당금애기는 부끄럽고 무서운 마음에 애써 아이 가진 기색을 숨기려 했지만 끝까지 식구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시준님과 만난 지 열 달이 다 돼가던 어느 날, 마침내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그 사실을 알고 말았다. 당금애기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노발대발하였다.
"우리가 너를 믿었더니, 네가 어찌 이런 부정한 일로 집안 망신을 시킨단 말이냐?"
당금애기는 시준님과의 일을 사실대로 말하였지만,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그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했다.
"네가 아이를 낳아 집안 망신을 시키느니 차라리 너 하나 죽어 없어지는 것이 옳은 일이다."
오라버니들은 칼을 꺼내 당금애기를 찌르려 하였다. 참으로 끔찍한 순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갑자기 칼자루가 뚝 부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오라버니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당금애기를 죽이려는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집안 망신을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때 뒷전에서 눈물을 머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금애기의 어머니가 보다 못해 당금애기를 구하러 나섰다. 치마로 당금애기를 감싸며 아홉 형제에게 말했다.
"얘들아. 이 아이의 옳고 그름은 하늘이 알 일이로구나. 이렇게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 저 뒷동산에 돌함에 있으니 거기에 갖다 넣어 보자꾸나. 죄가 없으면 하늘이 살리고 죄가 있으면 하늘이 알아서 벌을 내릴 터이니 그게 옳지 않겠니?"
아홉 형제는 어머니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그들은 솔개가 병아리를 채듯 당금애기를 훌쩍 채 가지고 뒷동산으로 길을 나섰다.
"아이고 어머니. 나는 가오, 나는 가오."
당금애기가 이렇게 울부짖자 어머니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고 얘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딸을 못 낳아서 그리 애를 태우다가 너를 낳아가지고 이렇게 보낸단 말이냐? 아이고, 난 못 하겠다."
그렇지만 아홉 형제는 애써 들은 체를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뒷동산에 오른 형제는 당금애기를 돌함 속에 집어넣고서 돌뚜껑을 닫아 덮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푸른 하늘에서 난데없는 천둥 벼락이 쳐대면서 흙비와 돌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홉 형제의 발바닥이 땅에 딱 달라붙어 버린 것이다. 형제들이 있는 힘을 다 써보았지만 발은 좀체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당금애기를 죽이려 한 아홉 형제는 그 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발이 떨어졌다고 한다.)
당금애기를 떠나보내고 나서 슬픔에 잠겨 눈물을 훔치고 있던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푸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뒷동산에 한바탕 흙비와 돌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난데없는 비라니. 혹시 우리 당금애기가 죽어 하늘에 올라가면서 눈물비를 흘리는 게 아닐까?'
어머니는 당금애기의 주검이라도 마지막으로 보려고 급히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돌함을 부여안고서 소리쳤다.
"아가, 내 딸 아가. 살았느냐, 죽었느냐? 제발 말 좀 해다오."
어머니가 애타게 두 번 세 번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어머니는 딸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다.
그때였다. 돌함 속에서 모기 소리 만하게 아이 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해서 점점 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함 뚜껑이 덜거덕 열리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귀여운 세 쌍동이 사내아이가 당금애기 품에서 울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푸르고 흰 학 세 마리가 아이들을 날개로 감싸 주고 있었다.
당금애기가 어머니를 보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머니, 이 아이들을 장차 어찌 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죽고만 싶습니다."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걱정 말거라. 내가 너희 모자를 지켜 주겠다."
어머니는 당금애기와 세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후원 별당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 곳에서 지내게 하였다.
당금애기가 처녀의 몸으로 한꺼번에 세 아이를 기르자니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두 아이에게 젖을 주면 꼭 한 아이가 울었다.
"아가, 울지 마라. 우리한테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찾아올 거야."
이렇게 아이를 달랬지만, 실은 당금애기도 속으로 아이와 함께 울고 있었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니 그 재주와 마음 씀씀이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불쌍한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그리고 글을 배우는데 서로 도우며 밤낮으로 공부하니 다른 아이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받아 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여전히 이들을 남 보듯이 하였다. 그리고 삼형제의 재주를 시샘한 다른 아이들이 형제를 따돌리면서 욕을 해대곤 했다.
"이 홀에미 자식들아. 저리 썩 꺼져라."
"애비가 없으면 병신이랜다."
삼형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픔이 뼛속까지 파고 들었다. 그렇지만 행여 어머니가 슬퍼할까봐 내색을 하지 않고 꾹 참았다.
그렇지만 어린 형제들이 고통을 한없이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 또 다시 친구들로부터 심한 놀림을 당한 삼형제는 마침내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고서 참아 왔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서러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제발 아버지를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당금애기는 울고 있는 아이들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얘들아, 울지 마라. 너희 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시란다. 그래, 이제 너희들이 이만큼 컸으니 아버지를 찾을 때가 된 것 같구나."
당금애기는 비로소 시준님에 얽힌 사연을 세 아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는 고이 간직해 두었던 박씨 세 개를 꺼내 삼형제에게 주었다.
삼형제는 뛸뜻이 기뻐하면서 뒤뜰에 박씨를 심었다.
다음날이었다. 삼형제가 심은 박씨는 하룻밤 사이에 벌써 싹이 나서 덩굴이 쭉쭉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삼형제는 급히 가마를 마련하여 어머니를 태운 다음 그 박덩굴 뻗는 방향을 따라서 길을 나섰다.
당금애기 집에서 나온 박덩굴은 하염없이 뻗어 나갔다. 그 박덩굴을 따라잡으려니 형제들은 거의 잠을 자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금애기가 안쓰러운 마음에 거듭 가마를 두고 가자고 하였지만 삼형제는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박덩굴은 과연 어디로 뻗어 나갔을까? 그 덩굴이 향한 곳은 한반도였다. 불라국 백두산을 거쳐서 해동국 묘향산과 계룡산, 지리산과 태백산을 감돌고 대관령을 넘어 설악산을 지나 금강산에 이르렀다.
금강산에 이른 박덩굴은 일만 이천 봉 아름다운 봉우리를 두루 감돌며 점점 깊은 산속으로 뻗어 들어갔다. 그 한 골짜기에 암자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박덩굴은 그 절로 뻗어 가더니 절을 둥그렇게 감싸 안았다.
그 절에는 한 스님이 그린 듯이 앉아서 맑은 목소리로 불경을 외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가마에 타고 있던 당금애기가 들으니 낯설지가 않았다. 오래 전 어느 날 자기 집에 와서 시주를 청하던 바로 그 스님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애타게 그리워하며 꿈마다 보던 시준님이었다.
당금애기는 가마에서 내려 말없이 시준님을 향해 합장을 드렸다.
당금애기를 발견한 시준님이 목탁을 두드리던 손을 놓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하셨구려.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허나 이게 다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으니 어찌하겠오."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당금애기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모습을 본 삼형제가 시준님에게 달려들어 소리를 쳤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시죠?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그러자 시준님이 짐짓 얼굴빛을 엄하게 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내 아들이라고? 믿을 수 없다. 만약 내 자식이라면 종이로 버선을 만들어 신고 저 냇물을 건너갔다 와 보거라. 버선에 물이 묻어서는 안된다."
삼형제는 시준님의 말씀대로 종이 버선을 만들어 신고 강을 건너갔다 왔다. 과연 그 버선에는 물이 한방울도 묻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내 아들이라 할 수 없다. 저 뒷동산에 올라가서 죽은 지 삼 년이 된 소뼈를 주워 살아 있는 소로 만들어 거꾸로 타고 오거라."
삼형제는 다시 스님이 시킨 대로 했다. 삼형제가 타고 온 말이 '음메'하고 울었다.
"그래, 꽤 재주가 있구나. 그렇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이번엔 짚으로 닭을 만들어 살아 움직이도록 해 보거라."
삼형제는 다시 시준님의 말씀대로 짚으로 닭을 만들었다. 닭이 완성되자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면서 커다랗게 '꼬끼오' 하고 울었다. 삼형제가 말했다.
"아버지, 이래도 저희들이 아버지 자식이 아닙니까?"
"아직도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합쳐 봐야만 내 자식인지 알 수가 있다."
삼형제는 시준님의 말대로 동이를 갖다 놓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었다. 그러자 삼형제의 피가 안개구름처럼 몽실몽실 퍼져 똘똘 뭉쳤다. 다시 시준님이 자기 손가락의 피를 동이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그 피 또한 안개구름처럼 퍼져 삼형제의 피에 한데 합쳐졌다.
"오냐, 너희들은 내 자식이 분명하다.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시준님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삼형제는 아버지 품에 안겨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한참이 지나 마음을 진정한 다음 맏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저희는 그 동안 이름도 없이 박대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희 형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오냐. 맏이 네 이름은 태산이라고 하고 둘째는 한강, 셋째는 평택이라고 하자꾸나. 평생을 가도 태산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한강 물이 마르지 않고 평택의 땅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내와 세 아들을 만난 시준님은 꼭 십년 만에 스님 행세를 그만두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한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고 고락을 함께 하며 행복한 삶을 누렸다.
지난 잘못을 뉘우친 당금애기의 오라버니들과 부모가 다녀가곤 하였다.
당금애기의 세 아들은 나라에서 재주를 아껴 벼슬을 내리는 것을 마다하고 지난날의 자신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평생을 살았다. 많은 아이들을 낳아서 훌륭히 길러낸 삼형제는 부모가 돌아가신 삼년 후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옥황상제는 하늘나라로 돌아온 시준님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허허허, 할아버지가 돼서 돌아왔군. 그래, 인간세상 살이가 어떠하던고?"
시준님은 옥황상제에게 인간세상에서의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어허, 그대 말을 들으니 인간세상의 재미가 천상에 못지 않구려. 그나저나 당금애기와 삼형제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가히 신이 될 자격이 있도다. 내 그들을 신으로 삼으리라."
옥황상제는 당금애기의 세 아들을 해동국 산신령으로 점지하여 사람들을 돌보게 하였다. 맏이는 금강산 신령으로, 둘째는 태백산 문수신으로 삼았다. 막내는 대관령 당산의 서낭신이 되었다.
옥황상제는 또한 힘들게 세 아들을 낳아서 훌륭히 키운 당금애기의 공을 기려 그를 삼신으로 삼았다. 아이 없는 집에 아이를 점지하고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돌봐준다는 삼신 할머니가 바로 이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