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연못-내앞에 놓인 노년(다음블로거 뭇새님의 글)
줄거리는 은퇴한 노교수 노먼이 아내와 함께 여름 별장이 있는 황금연못에서 보내는 어느 여름에 대한 이야기이다. 노먼은 나이가 80이 되었고, 기억력이 자꾸 감퇴되어가고 자신감이 없어지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로 늘 입에 죽음을 달고 다닌다. 독설가인데다가 노인성 우울증 증세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셀은 활기 있고 여전히 아름다운 '귀여운 할망구'이다.
둘은 여름을 보내기 위해 황금연못으로 오고, 오랫동안 아버지와의 불화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던 딸 첼시가 남자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첼시와 노먼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이다. 아버지는 딸을 사랑하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을 모르고 있고, 딸은 여전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뚱뚱하고 아버지에게 칭찬받지 못하여 의기소침한 어린 소녀에 고착되어 있다.
첼시는 남자친구 빌과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서 빌의 아들 빌리를 맡겨 놓고 떠난다. 여전히 갈등은 그대로인 채...
첼시가 떠나고 어린 빌리와 남은 노먼은 빌리에게 책을 읽게 하고, 다이빙을 가르치고, 송어낚시를 한다. 암초가 많은 곳으로 낙씨를 하러 떠났다가 배가 암초에 부딪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에셀이 구조해 오는 등의 일을 겪으면서 셋의 생활은 마치 한 가족처럼 끈끈한 유대로 묶인다. 노먼은 빌리를 통해서 첼시와는 풀지 못했던 오랜 갈등을 스스로 풀어 나간 것이다.
첼시가 돌아오고 그녀는 아버지와 빌리 사이에 자기가 원했던 그런 가족관계가 형성된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어머니의 조언대로 첼시는 아버지에게 빌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한다. 첼시는 아버지로부터 잘했다는 긍정적인 말을 처음으로 듣고 비로소 오랜 부녀간의 갈등을 풀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 나는 먼저 노년을 보았다. 늙어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노년이 된다면 그 노년을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통이나 심술로 주변 이들에게 비칠 것이다. 그 점에서 여자보다 남자의 노년이 더 힘들어 보인다.
여자는 늙어도 여전히 자기의 역할이 있는데-밥 하고 청소 하고 딸기를 따고 등등...- 남자의 경우 그 역할이 없어지는데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이 더 커지는 셈이다. 그것은 특히 왕성한 활동을 하였던 전문직에 종사했던 남자에게서는 더 강할 것이다. 노먼의 경우처럼.
두 번째, 세대간의 갈등과 그 해소를 보았다. 부모세대와 자식세대는 애증의 관계이다. 너무 밀착되어 있기에 서로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고 욕심을 부린다. 그러면서 세대가 다름으로 해서 오는 그 차이를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일종의 경쟁관계이며 동일시대상이기 때문에 오는 갈등이 크다. 그러나 한 세대를 넘어 선 조손과의 관계는 부모자식간의 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조손과의 관계를 사회심리학에서는 '주변인'이란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나 손자나 모두 중심 인물의 역할을 뺐겼거나 아직 권력을 지지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관계라는 점이다.
그런 어려운 용어가 아니라도 우리 어머니 말처럼 '손자는 사랑만 주면 되는 존재인데 비해, 자식은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존재'이다.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사랑만을 주면 되는 관계이니 조손간의 관계는 허용적일 수밖에 없다. 애증보다는 애정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세 번째 의사소통의 방식을 보았다. 크게 보면 인간관계는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사소통을 위해서 문학이, 미술이, 음악, 연극이, 모든 예술이 탄생한 것은 아닌가. 나의 의사를 영원히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만든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무엇인가? 그것은 팽팽한 줄다리기, 감정의 줄다리기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한쪽이 그 끝을 놓아버리면 그 팽팽함은 허물허물함으로 변해 갈 것인데 애정이 깊으면 그 팽팽함을 놓는 것 자체를 애정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나이가 드는 것을 넘어서 나이를 정말 많이 먹어, 살 날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자연히 그 팽팽함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영화 속에서 노먼의 의사소통 방식은 일상적이지 않다. 상당히 자기방어적이다. 그 방어적인 공격을 포기해 버리면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질 것 같은 조바심이 그의 독설과 무관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성인의 자기방어적 독설은 그것이 내면적으로는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독설이며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만 남게 된다. 그것이 풀리지 않은 채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결국 소통방식의 몰이해가 소통의 부재로 나아가게 된다. 애정을 표시하지 않은 노먼의 의사소통 방식이 첼시에게는 늘 불행의 뿌리였을 것이다.
영화는 아름다운 호수 풍경을 배경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들이 이미 분장할 것도 없이 노년을 맞이한 대배우들이라 그들의 일상을 보는 것처럼 익숙한 풍경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첼시와 노먼이 화해를 하고 그들은 떠나고, 노먼과 에셀도 여름별장을 떠나면서 노먼은 심장발작을 일으킨다.
삶이 결국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 죽음이 일상적으로 상존해 있다는 사실, 알고는 있지만 정작 진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지의 의문을 품으며 아름다운 영화였지만 마음이 시리었다. 내 앞의 노년이 눈에 밟혀서...(2008. 7.)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 1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