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운영을 통해 효율적인 지방통치를 취하였다. 이는 8도 체제 및 군현제의 정비로 나타났는데, 8도체제는 태종13년(1413)에 정비됨으로써 중앙과 군현을 잇는 중간행정구역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8도의 하위체제였던 군현제에 대한 정비는 태종16년(1416)에 제주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일단락 되었다.
8도에는 관찰사(감사,도백,방백이라고도 부름)를 파견하였고, 여기에 예속된 전국 330여 개의 군현(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의 총칭)에는 수령(守令,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의 총칭)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제도를 확립하였다.
관찰사의 지휘·감독하에 있었던 수령은 군현의 모든 대민행정을 직접 대행하는 왕권의 대행자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성패는 지방의 향촌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대행자인 수령의 권한 강화와 효율적인 규찰에 달려 있었다.
8도체제가 성립되기 이전, 제주도는 여말선초 계수관(전국의 교통로나 큰 고을을 중심으로 주위의 작은 고을을 통할하는 통치방식)지역의 하나인 나주목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그 뒤 8도의 하나인 전라도가 정비됨으로써 제주도는 전라도에 예속되었다.
태종16년(1416) 제주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의해 제주의 지방행정구역은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의 삼읍체제로 개편되었다. 이는 제주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중앙정부의 의도였다. 당시 제주도는 말의 생산지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고, 이러한 중앙정부의 인식은 제주에 대한 강력한 지방통치로 나타났다. 이러한 삼읍체제는 한말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1914년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500여 년 간이나 유지되었다. 삼읍의 행정구역은 일반적으로 제주목은 동쪽 종달에서 서쪽 두모에 이르는 즉, 한라산 북쪽 일대였다. 정의현은 시흥에서 법환에 이르는 즉, 제주의 동남부 일대이며, 대정현은 강정에서 고산에 이르는 즉 제주의 서남부 일대이다. 시기에 따라 삼읍의 경계 및 행정구역의 범위에 다소 변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주목 종달이 정의현, 정의현 법환이 대정현에 소속되었던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삼읍에는 고을 원님이라 부르는 수령으로 제주목사(정3품), 정의현감(종6품), 대정현감(종6품)이 중앙에서 파견되었으며, 제주목에서는 목사를 보좌하는 관리로 판관(종5품)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판관은 엄밀히 한 고을을 책임지는 수령은 아니었으나, 제주목사를 대신해서 제주목의 행정을 주로 관장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제주목사·정의현감·대정현감 외에 제주판관을 넣어 제주 4관이라 칭하기도 한다. 제주목사는 형옥, 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의 고찰, 왜구의 방비등 제주도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고 사후에도 전라도 관찰사에 1년에 두 차례보고를 행하여야 했다. 삼읍설치의 배경은 제주도 주민의 증강로 소송이 빈번하게 발생하나, 이를 처리할 관아가 한라산 북쪽 한 곳에만 있어 한라산 남쪽 주민들이 관아를 왕래하는 데 커다란 불편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사철에 관아를 왕래하게 되면 2-3일이 소요되어 농사 시기를 잃는 경우가 빈번하였고, 한라산 남쪽의 토착세력들이 불법적인 수탈을 일삼지만 제주목사의 통치력이 효율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조선말 고종때까지 제주목에 파견된 목사의 수는 275명이었으며, 짧게는 1개월, 길게는 6년4개월 정도 현지에 체재하였는데, 제주목사의 평균 재임기간은 1년 8개월 정도였다.
목사의 행정기관인 제주목은 현재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의 목관아지터(사적380호)에 위치하였따. 이 곳은 태종 16년(1416) 제주도가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나누어지기 이전부터 탐라국의 치소였을 뿐만 아니라, 탐라국이 고려의 지방 행정구획으로 편입된 후에도 대촌현의 중심지역으로 관아가 위치해 있었다. 제주목관아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세종 17년(1435) 최해산 목사가 제주목 관아건물이 모두 불에 타 버리자, 영청인 홍화각을 건립하면서 종루,침실,욕실,독서방,금당,정당,약고,둑소,낭사,영고 등 모두 206칸의 관아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요시설들을 보면, 궐패와 전패를 모셔 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를 하던 영주관(객사)을 중심으로 영청인 홍화각, 제주목사의 동헌인 연희각, 동헌의 외대문인 종루, 망경루, 애매헌, 귤림당, 그리고 판관의 돈헌인 찬주헌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이외에 목사.판관의 사적인 공간인 내아가 있으며, 좌수·별감이 집무하던 향청, 육방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작청, 군장교의 장청, 회계사무를 관장하던 공수청, 죄인을 가두는 옥, 노복들의 거처인 관노방 등 많은 관아시설이 위치해 있었다. 1991년 이후 이유적에 대한 발굴을 통해서 관아시설물군은 크게 세 번 걸쳐 건축되었음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주초석, 그리고 분청사기편, 백자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관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적 목적에 따라 읍성을 쌓았는데 제주목관아지도 제주읍성으로 둘러 쌓여 있다. 따라서 제주읍성은 제주목사와 제주판관 등 지방관의 거처인 동시에 정책의 산실이고 명령을 집행하는 곳이었다. 읍성의 경우, 행정적인 목적 외에도 군사적인 기능도 있었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조건으로서 자연지형은 매우 중요하게 고려될 수 밖에 없었다.
제주읍성은 한말까지 유지되다가 1910년 읍성철폐령이 내려지면서 훼철되기 시작하여, 북성문·동성문·서성문·간성문 등의 문루가 먼저 헐리고, 이후 1920년대 후반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 공사때 바다 매립을 위한 용도로 성돌이 쓰이면서 제주 읍성의 대부분은 헐리고 말았다.
제주의 방어 체제
제주도 방어체제의 주요 목적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비였다. 이를 위해 3개 읍성인 제주읍성인 제주읍성·정의현성·대정현성을 중심으로 9개 진성(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과 25봉수, 38연대의 방어체제가 마련되었따. 왜구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했던 일본의 해적집단을 말한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들이 땔감과 물·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왜구들은 고려 말부터 그들의 활동 중간 기착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주에 빈번히 침입하여 방화·약탈·인명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공물 운반선을 약탈하는 등 조선 전시기에 걸쳐 수없이 침입하여 횡포를 부렸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제주 방어체제의 마련은 고려 말부터 논의되어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봉수의 설치가 충렬왕28년(1302)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태종 8년(408)에는 제주에 병선이 없었던 까닭에 병선을 만드는 전라도 사람들을 보내 병선 10척을 만들도록 하였따. 그리고 태종 17년(1417)에 제주의 공·사선의 경우에도 왜구에 대적하기 위하여 병선과 마찬가지로 병기와 갑옷을 구비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김녕·조천관·도근천·애월·명월·차귀·동해·서귀·수산 등 9개 지역에 방호소가 설치되었따.
봉수는 제주목에 10개소, 대정현에 5개소, 정의현에 7개소가 축조되었다. 울러 연대의 시기별 설치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봉수의 축조와 맥락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주도의 관방시설에 대한 대대적ㅇ니정비는 세종 21년(1439)에 이루여졌다.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은 기존의 이러한 방어시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외에 수산·차귀방호소 등에 진성을 쌓아 군인을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 제주목사 이명겸은 왜구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주목에 30척, 정의현과 대정현에 각각10척씩 모두 50척의 병선을 요구하였따. 그 후 진상물 운반선에 대한 왜구들의 약탈이 더욱 심해지자, 성종20년(1489)에 조정에서는 직접 군인들을 선발하여 공물 운반 선박을 호송토록 하였다.
한편 중종 5년(1510) 9월 장림 목사는 「제주 방어를 위해 성이 없는 지역에 성의 축조를 확대해 줄 것, 삼읍 병선의 수리, 활·화약의 추가 지급, 군기시에 바치는 죽은 말의 근육을 면제해주어 이를 활의 제작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줄 것, 수레·화포의 지급」등르 건의하였따. 제주의 방호소는 점차 9진으로 개편되어 나갔다. 즉, 수산진성과 차귀진성은 세종 21년(1439),명월진성과 별방진성은 중종 5년(1510), 애월진성은 선조 14년(1581), 화북진성은 숙종 4년(1678)에 축조되었고, 모슬진성은 숙종 4년(1678)에 동해진성을 옮겨 쌓은 것이다. 그 외에 세종과 중종 때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귀진성과 조천진성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제주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체계적인 정비가 이루어 졌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근절되지는 않았따. 숙종 30년(1704)에는 왜구 50여 척이 가파도에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에 제주방어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이에 숙종 32년(1706)에 수산·차귀진에 만호를 설치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숙종 42년(1716)황구하 어사가 차귀진 만호를 혁파 하였으며,숙종 44년(1718)에는 수산진 만호도 혁파되었다. 그라나 영조 40년(1764)에 명월진 조방장을 승격하여 만호를 두었는데 오랫동안 유지 되었다. 한 편 제주 방어를 고려하여 제주 무과 출신 중에서 3명을 추천하면 병조에서 임명하는 방안이 정례화 되었다.
제주의 진상품
조선시대 제주는 국가에 대한 중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진상기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대표적인 진상물은 말과 귶, 해산물, 약재 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제주도 중산간 지역은 대부분 진상을 위한 말을 키우는 국가 목장이었을 정도로 말의 진상이 있었는데, 10소장으로 대표되는 제주도 목장에는 일반적으로 4천-1만필 내외의 말이 사육되어 모두 중앙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제주 공마는 태종 8년(1408)에 공부로 정해졌는데, 제주의 민호를 가족 수에 땨라 대·중·소로 나누어 대호는 대마 1필, 중호는 중마 1필, 소호는 5호가 합하여 중말 1필을 바치도록 하였다.
제주공마는 해마다 바치는 연례공마, 3년마다 바치는 식년공마, 그리고 부정기적으로 바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충당하기 힘든것은 부정기적으로 바치는 말이문제였다.
즉 왕명에 의해 전마 혹은 무역을 위한 말의 징발이 수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관리들이 민간에서 기르는 말을 빼앗아 사사로이 중앙정부에 바치기도 하여 그 폐단은 적지 않았다. 공마는 중앙정부, 즉 병조에서 우마적에 기초해 징발 대상의 말을 선정하여 사복시에 하달하면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제주목사에게 전달되었다. 제주목사는 이를 삼읍의 감목관에게 하달하고, 삼읍 감목관은 각 목장에서 말을 징발하는 책임을 맡았다.
각 목장에서 징발된 말은 제주목 관아인 관덕정 앞에서 다시 우마적과 일일이 대조한 후, 선박으로 운반되어 해남·강진·영암 세 곳에 이르게 된다. 여기부터는 육로를 통해 말을 한양까지 몰고 가게 되는데 이에 소용되는 말의 먹이나 마부들의 비용이 모두 제주도민들에 의해 충당되었다.
다음으로 귤의 진상이다.
중앙정부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감귤은 제주도에서 진상된 것이었따. 조선시대 제주에는 귤의 진상을 위하여 곳곳에 과수원을 설치하여운영하였다.「경국대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주·정의·대정 등 삼읍에서는 매년 귤나무를 새로 심거나 접붙이기를 하여 인근 주민들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였는데, 매 12월에는 수량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과수원의 조성은 중종 21년(1326) 이수동 목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형상 목사 당시에는 과수원의 수가 42곳으로 증가 하였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관리하였으나 점차 과수원을 지키는 소위 「과직」을 두어 운영해 나갔다. 그러나 결실초기에 기록된 숫자에 맞춰 낙과에 의한 피해 숫자까지도 채워야 하는 과직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여서 제주도민들은 과직으로 착출되는 것을 매우 기피하였다.
또 관아 소속의 과원만으로는 조정에서 요구하는 귤을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민간에게 귤나무 8그루를 재배토록하고 열매를 관아에 상납하면, 한 사람의 1년 역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선조 때부터는 제주에서 그 해의 첫 귤을 진상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감귤을 나누어주면서 과거를 실시하는 것이 하나의 고나례로정착되기도 하였다. 이를 감제 혹은 황감제라 하였는데, 수석으로 급제한 자에게는 전시에 바로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또 전복·해삼·미역·옥돔 등 바다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도 중요한 진상물이었다. 해산물의 진상을 위하여 포작인과 잠녀를 특별히 두어 이들로 하여금 진상에 필요한 해산물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진상용 뿐만 아니라 관아에서 쓰이는 물품들도 모두 담당하였느데, 당시 포작인과 잠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제주지방에서는 이 역이 모두 고역으로 인식되어 6고역의 하나로 불리었다.
세종 25년(1443)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기건목사는 포작인과 잠녀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고는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전복을 밥 상에 올리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하였따. 이외에 여러가지 약재의 진상도 이루어 졌다.
▷자료출처 : 국립제주박물관 저서 '濟州의 歷史와 文化' 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