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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 잃은 슬픔이 오름에 깃들어

 

 

   
 
성산일출봉에서 남쪽 바닷물 건너편에 자리한 해발 60m의 작은 오름 식산봉(食山峰). 소나무와 대나무, 동백나무와 까마귀쪽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우거져 있고 주변경관이 수려해  가족 또는 연인끼리 산림욕을 즐기며 산책하기에는 그만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그런 작은 봉으로 보이지만 식산봉은 한 여인의 순결한 사랑과 왜구로부터 마을을 구한 사연 등 봉에 얽힌 설화는 만만치 않다.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에 위치한 식산봉은 제주들녘을 수놓고 있는 여느 오름처럼 화산분출에 의해 형성됐다. 해발 60m, 면적은 80,000㎡로 규모는 작지만 50과 91속108종류의 식물이 살고 있는 자연의 보고다.

또 소나무와 대나무, 동백나무와 까마귀쪽나무, 후박나무 등 11종의 상록활엽수가 우거져 있고 남쪽으로는 신비롭게 솟아난 일출봉을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어 산책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이와 함께 식산봉 아래 8만여 평의 양어장에는 숭어와 뱀장어, 우럭, 넙치 등이 자연서식하고 있어 유명낚시터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식산봉의 형태를 놓고 흔히 옥녀산발형(玉女散發形)이란 한다. 그 뜻은 아름다운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고 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으로, 이와 관련해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옛날 오조마을에는 부씨성을 갖고 있는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이웃집에 살고 있는 옥녀라는 아리따운 처녀와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부씨 총각은 대장장이의 아들 이었고, 옥녀는 양반댁 규수로 신분의 차이로 인해 쉽사리 혼인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남몰래 가슴앓이를 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던 둘에게 불행이 닥쳐온다. 마을을 지키는 관리인 조방장(助防將)이 어느 날 마을을 둘러보다 옥녀를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탐을 내게 된 것이다.

조방장은 직위를 이용해 옥녀의 가문과 내력을 속속히 알아보고 사람을 놓아 그녀의 부모에게 자신의 첩으로 옥녀를 달라고 청한다. 그 과정에서 옥녀와 이웃집에 살고 있는 부씨 총각이 남몰래 사랑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시기와 질투에 휩싸인 조방장은 옥녀를 차지하기 위해 장애물인 부씨 총각을 제거하기로 한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선량한 사람의 목숨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는 비뚤어진 생각에 잠긴 조방장은 관가로 돌아와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어 씌워 부씨 총각을 잡아들이고 고문 끝에 목을 매달아 죽인후 시체를 마을동쪽 바닷가에 버린다.

옥녀를 차지하기 위해 장애물을 제거했다고 생각한 조방장은 이번에는 옥녀를 잡아들여 숙청을 들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부씨 총각과 깊은 사랑에 빠져있던 옥녀는 목숨의 위험을 느끼면서까지 조방장의 청을 거절한다.

온갖 고문과 협박에도 끝내 숙청을 거절하자 조방장은 이내 옥녀를 포기하고 풀어주기에 이른다. 관가에서 풀려난 옥녀는 그길로 사랑하는 부씨 총각의 시신이라도 찾겠다는 일념으로 바닷가를 헤매고 결국 마을 동쪽 바닷가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부씨 총각의 시신을 찾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앉아 통곡하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며칠째 옥녀의 몸은 서서히 굳더니 지금의 식산봉으로 변해 버린다. 또 부씨 총각의 시신은 식산봉 맞은편 언덕인 ‘장시머들’로 그리고 부씨총각의 시체를 안장하려고 마련한 관은 바닷물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 ‘일출봉’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양식이 산을 이룬다는 식산봉(食山峰)에는 그 명칭이 생겨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우도와 오조마을 해안에는 왜구의 침입이 유독 잦았다고 한다.

왜구들은 시시때때로 마을을 침입해 갖은 악행을 저지르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을을 지키는 조방장이 새로 부임한다.

신임 조방장은 마을에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 가지 전략을 세운다.

마을 앞에 있는 작은 봉을 왜구들에게 군량미로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량미가 산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면 많은 군사가 주둔한 것처럼 왜구들에게 보일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조방장은 즉시 관원과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봉 전체를 마치 식량을 쌓아둔 것처럼 위장한다.

이 전략을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데 호시탐탐 오조마을 습격을 엿보던 왜구들은 마을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군량미를 보고 자신들을 잡기위해 많은 군사가 주둔한 것으로 착각해 다시는 오조마을을 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군량미가 산을 이룬 것처럼 보였던 봉을 가리켜 식산봉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 자료 : 제주관광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