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바움의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읽으면 어쩐지 무지개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주디 갈란드가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부른 ‘무지개 너머 (Over the Rainbow)’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어렸을 때 조그만 흑백 텔레비전으로 봤는데, 머리를 양갈래로 쫑쫑 땋아내린 주디 갈란드의 그 도톰한 입술, 통통한 뺨, 반짝이는 눈이 어제 본 듯 선명합니다. 도로시가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와 함께 팔짱을 끼고 캉캉춤 추는 것처럼 다리를 흔들며 부르던 노래 ‘노란 벽돌길을 따라서 (Follow the Yellow Brick Road)’도 내 귀에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지개 너머’는 요새도 가끔 들을 수 있지만 ‘노란 벽돌길을 따라서(Follow the Yellow Brick Road)’는 좀처럼 안 나옵니다. 그 노래를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속 노래 제목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 책은 풍성한 색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온통 회색빛”인 캔자스 평원의 집이 회오리바람에 날려 뭉크킨의 나라로 떨어진 직후부터 “온갖 빛깔의 화려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 다음 나타난 뭉크킨 사람들을 보세요. 아주 정신이 번쩍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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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옷을 입은 뭉크킨 남자들을 만난 도로시 | 남자들이 쓰고 있는 모자는 파란색이었고 여자가 쓴 모자는 하얀색이었다. 여자는 어깨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지는 하얀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망토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작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남자들은 모자와 똑같은 색깔의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윤이 나게 잘 닦인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뿐인가요. 다음날 초록색 에메랄드 시로 여행을 떠나는 도로시는 “하얀색과 파란색의 줄무늬가 들어간”옷을 입고, “분홍색 모자”를 쓰고, “하얀 손수건”으로 빵이 담긴 바구니를 덮고, 마녀가 신었던 “은구두”를 신고, “새까맣고 동그란”눈으로 따라오는 강아지 토토를 데리고, “노란색 벽돌”이 깔린 길을 걸어갑니다. 책의 뒷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로시가 지나는 인형의 나라에는 “은색과 금색, 자주색의 현란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들”, “분홍색과 노란색, 푸른색의 줄무늬가 들어간 반바지를 입고 황금색 장식이 달린 신발을 신은 양치기들”, “노란색과 붉은색, 초록색이 칠해진 예쁜 옷”을 입은 광대가 나옵니다.
도로시의 소원을 들어 주는 착한 마녀 글린다는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에 눈처럼 흰 옷을 입고 신비로운 푸른색 눈을 갖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걸 지나서 정신이 없어질 지경입니다. 오즈 시리즈 첫 번째 책에 일러스트를 맡았던 W. W. 덴슬로우의 그림은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를, 특히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의 모습을 너무나 잘 그려 놓아서 그 이후의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만, 바움의 그 현란한 색채 감각을 살려 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덴슬로우는 첫 번째 책 일러스트만 그린 뒤 바움과 헤어졌습니다. 「오즈의 마법사」를 뮤지컬로 만드는데 자기도 로열티를 받아야겠다고 우겨서 둘 사이에 싸움이 났답니다.
『오즈의 마법사』시리즈 열네 권이 모두 나왔다는 기사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열네 권으로 그치지는 않습니다. 프랭크 바움이 죽은 후 다른 작가들, 심지어는 두 권째부터 일러스트를 맡았던 존 R. 닐도 이 이야기를 계속 썼습니다. 그러나 바움이 쓴 오즈 이야기는 모두 열네 권인데, 이 숫자가 오묘합니다. 무지개의 숫자인 7의 두 곱이잖아요. 그러니까 오즈 시리즈는 쌍무지개인 셈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정말 무지개 같은 이야기들! 이 생각을 해내고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으쓱해 했습니다.
오즈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정답게 다가오는 캐릭터는 아마 도로시보다도 도로시의 세 길동무,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일 것입니다. 『시간의 주름』으로 유명한 미국의 판타지 작가 매들린 랭글은 어린 시절 뉴욕의 아파트 창 밖을 내다보며, 자기도 겁쟁이 사자처럼 용감해지리라는 것, 양철 나무꾼처럼 진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 허수아비처럼 언젠가는 두뇌를 갖게 될 것이며 그래서 선생님이 나를 바보로 생각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덧붙이자면 뭔가 근원적인 그리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도로시처럼 언젠가는 그리운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배우겠지요.
프랭크 바움이 직접 큰소리쳤다시피 이 이야기는 전래동화와는 다른 “더욱 새로운 마법 이야기 newer wonder tales”입니다. 그 다르고 새로운 점 중에서도 가장 큰 다른 점은 아마도, 이토록 마법이 난무(?)하는 이야기 안에서 정작 주인공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 속에서 끌어 냈다는 점일 것입니다. 특히 허수아비가 그 점에서는 돋보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 나에게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뇌가 없단 말이야.” 하면서 서글픈 얼굴이 되는 허수아비는, 그러나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불쾌한 일이거든.”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똑똑해지기가 보통 일인가요.
게다가 그는 자기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성냥이라는 것을 알리고 불가에서 멀리 떨어져 앉을 만큼 사리도 분별할 줄 알고, 자기 몸뚱이가 짚으로 만들어져서 상처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걸 이용해 일행을 돕는 희생 정신도 갖고 있습니다. 이 길 끝에 에메랄드 시가 있는지 누가 알겠느냐는 도로시의 질문에 “틀림없어. 왜냐하면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만약 그게 생각할 수 있는 뇌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추측이라면 나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거야.”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 허수아비에게는 대단한 직감력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계곡 위로 나무를 베어 넘겨 다리를 만들자는 순발력 넘치는 생각도 허수아비에게서 나옵니다. 뇌가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이 허술한 허수아비에게서 오히려 우리는 뇌가 있는 존재는 어떻게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어떻게 사리를 분별하고, 어떻게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슬기를 발휘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주위 사람 꼽아볼 것도 없이 우선 나 자신부터 이 허수아비보다도 못하지 않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양철 나무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없어져 사랑을 잃어버렸다면서 마음 아파하는 그는 길을 가면서 툭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 발에 밟힌 벌레 한 마리 때문에 말입니다. 사자 저녁거리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사슴 때문에, 강 한가운데 홀로 남은 친구 허수아비 때문에. 꼬리털로 눈물을 닦아 준 사자가 꼬리를 쳐들고 햇볕에 한참을 말려야 할 정도입니다.
"조금이라도 위험이 닥쳐 오면 나는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벌벌 떨리는걸." 하고 하소연하는 사자는 그 꼬리털로 자기 눈물도 닦습니다. 그러나 사자도 마냥 벌벌 떨며 눈물만 닦고 있지는 않습니다. 떠내려가는 뗏목을 기슭으로 대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을 치고, 까마득한 절벽 사이를 동무들을 등에 태운 채 몇 번이고 뛰어넘습니다. 자기를 가둔 나쁜 마녀에게 “으르렁거리며 맹렬한 기세로” 덤벼들어 오히려 마녀를 겁먹게 합니다.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지혜와 사랑과 용기가 사실은 자기 안에 오롯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참 다정하면서 고무적입니다. 그 메시지가 제법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생생한 캐릭터와 재미있는 사건들 안에 재치있게 담아 낸 솜씨는 감탄할 만합니다.
이런 무지개같이 다채롭고 화려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 낸 프랭크 바움은 그 자신이 참 다채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심장 질환을 앓아 다니던 군사 학교를 그만두었고, 집안의 석유 사업에 참여해 세일즈맨 노릇도 했고, 쇼 윈도 계통 직업에도 뛰어들어 쇼 윈도 장식법에 관한 책도 냈고, 신문 만드는 일, 배우 노릇, 음악까지 담당한 뮤지컬 연출자 노릇, 영화 제작 등등 온갖 직업을 섭렵했습니다.
오즈 시리즈가 한창 나오던 중에 파산했다가 다시 일어서기도 했고요. 갖가지 다양한 필명으로 인형 이야기부터 모험 이야기까지 온갖 장르의 이야기를 엄청나게 많이 써 냈습니다. 그만큼 넘치는 상상력과 정력을 어쩌지 못하고 정신없이 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친구가 "그는…끊임없이 상상력 훈련을 하고 다녀서 나중에는 자기가 한 일과 상상한 일을 구별하기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적어도 소금 반 파운드는 덜어 내고 들어야 했다."는 평을 했을까요.
그러나 그 상상력으로 바움은 너무나 화려하고 재미있는 마법이 가득찬 마술의 세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비록 오즈 책들이 구성이 엉성하다며 문학적으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만, 미국 어린이 문학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본격 판타지라는 점, 너무나 미국적인 캐릭터와 세계관으로 미국 아이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또 다른 보편적인 재미로 다른 나라 아이들과 어른들도 매혹시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000년, 오즈 탄생 백주년을 맞아 후배 작가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이 『100주년 기념집』을 낸 것을 보았습니다. 모리스 센닥, 유리 슐레비츠, 딜론 부부, 피터 시스, 크리스 반 알스버그, 에릭 칼 등 쟁쟁한 일러스트레이터들과 매들린 랭글, 로이드 알렉산더, 나탈리 배비트 등 당대의 작가들이 수필과 그림을 내놓아, 정말로 무지개처럼 눈부신 책을 꾸몄습니다. 에릭 칼의 배고픈 애벌레가 양철 나무꾼 차림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그림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트리갭의 샘물』 같은 걸출한 판타지를 내놓은 나탈리 배비트가 선배를 기리며 바친 헌사를 들려 드립니다.
“프랭크 바움은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나는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책이 말해 준다. 그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지 알았다는 점,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들, 완전히 새로운 마법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알았다는 점을 말이다.
새로운 창조물과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는 데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양철 나무꾼,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두들 합리적(reasonable)이다. 이야기 안의 마법과 판타지는 합리적이지 않은 한 아무 소용이 없다. 프랭크 바움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최근에 『오즈의 에메랄드 도시』를 근 오십 년 만에 다시 읽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너무나 멋지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기억이 나서 아직도 그런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다. 아직도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