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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와 문도령

한겨레 구전신화 시리즈 그 여섯번째 이야기입니다. '인간소녀와 하늘도령의 사랑'이라는 부제를 붙인 자청비와 문도령 이야기입니다. 제주도 무속신화 '세경풀이'를 다듬은 것이지요. 자청비와 문도령은 농사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세경풀이'는 이야기 가닥이 많고 서사적 짜임새가 복잡한데, 결말부분 등을 아이들에게 맞게 조금씩 손을 보았습니다. 아래의 초안은 동화작가의 글쓰기 작업을 거쳐 한겨레 옛이야기(한겨레신문사, 1999~) 제3권에 수록되었습니다. (조카들한테 한번 들려주면 아주 좋아할걸요.)
  
 
** 자청비와 문도령 - 인간소녀와 하늘도령의 사랑
 
 
 옛날 옛적의 일이다.
 제주도 주년뜰이라는 곳에 나라에 큰 벼슬을 한 김진국 대감과 자주부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논밭이 많고 갖가지 세간에다가 하인들을 여럿 둔 큰 부자였다. 그런데 대감의 나이가 서른 마흔을 지나 쉰 살이 가까워 오는데도 자식이 없어 큰 걱정이었다.
 하루는 대감이 심심하던 차에 동구밖 세거리 팽나무 그늘에 앉아서 시골 노인과 바둑을 두는데 어디선가 하늘에 울릴 듯한 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대감이 바둑을 멈추고 그 웃음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서 가보니, 거적을 쳐놓고 빌어먹는 비렁뱅이가 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대감이 그 모습을 보고 집에 와서는 보석함에서 금거북과 은개구리 따위를 꺼내놓고서 웃음을 지어 보려 하였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무엇하고 논밭이 많으면 무엇하리. 자식이 없으니 다 소용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서 먹는 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자주부인 또한 곁에 앉아서 시름할 뿐이다.
 그때 주년뜰 동쪽 시내 건너 상주사의 화주숭이 대감 집에 시주를 청하러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대감님과 마나님의 안색이 좋질 않으시니 어쩐 일이십니까?"
 "글쎄, 그럴 일이 있다오."
 "우리 절 부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는데……. 한번 사연을 말씀해 보십시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나이 쉰이 다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오. 자식을 하나 볼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으련만……."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미 한 섬과 은 백냥 백근을 우리 절에 시주하시면 자식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내 그렇게 하리다."
 대감은 자식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시주를 올릴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곧바로 백미와 은 백냥 백근을 준비하여 상주사로 향하였다.
 대감 일행이 길을 나서서 동쪽 시내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난데없이 한 스님이 나서서 길을 막고 김진국 대감에게 뵙기를 청하였다.
 "잠깐 길을 멈추고 소승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스님은 어떤 분이길래 길을 막는단 말이오?"
 "소승은 서쪽 시내 건너 백금사의 화주승입니다. 대감께서 상주사에 시주 가신다는 말을 듣고서 놀라 쫓아왔습니다. 대감마님, 상주사보다는 우리 백금사 부처님이 훨씬 영험하시답니다. 우리 절에 공양하고 자식을 얻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지요. 우리 절에 시주를 올리시면 틀림없이 자식을 보실 것입니다."
 그 말에 솔깃한 김진국 대감은 서쪽으로 길을 바꾸었다. 그리고 서쪽 시내를 건너 백금사에 백미와 은을 공양하고 부처님께 네 번 절을 올렸다.
 "집에 돌아가신 뒤에 틀림없이 태몽을 꾸실 것입니다."
 대감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온 후 며칠 만에 꿈을 꾸었는데, 청주 술에 채소 안주를 먹는 꿈이었다. 대감은 즉시 해몽하는 사람을 불러 꿈을 풀어 달라고 하였다.
 "딸아기를 낳으실 꿈입니다."
 그런데 이때 대감집 하녀 정술데기가 옆에 있다가 자기 꿈도 풀이해 달라고 나섰다.
 "저는 어젯밤 꿈에 소주 술에 고기 안주를 먹는 꿈을 꾸었답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 모습을 본 김진국 대감이 어이없어 하면서 정술데기를 꾸짖었다. 그러자 해몽하는 이가 말하였다.
 "꾸짖지 마십시오. 그건 아들을 낳을 꿈입니다."
 그 후 과연 자주부인과 정술데기에게 각기 태기가 있었다. 열 달 후에 자주부인이 한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으니, 대감이 그 이름을 자청비라고 지었다. 한편 정술데기 또한 같은 날 같은 시에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정수남이라고 지었다. 정수남이가 태어난 것은 백금사에게 시주를 빼앗긴 상주사 화주승의 조화였다.
 김진국 대감의 딸 자청비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났다. 그 용모는 가냘프고 고왔는데, 성격은 남자와 같이 활달하였다. 가만히 있지 않고 일하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있는 베틀이란 베틀을 장난감삼아 옷을 짜는데 그 솜씨가 남달랐다. 들판에 나가면 하인들이 논농사 밭농사하는 것을 일일히 참견하면서 한목 거드는 것이었다. 부모는 그러한 자청비의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대견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꼭 머슴아같이 일도 잘 한단 말이야."
 "좀 얌전해야 할텐데. 저래 가지고 어떻게 시집이나 갈는지 걱정이예요."
 자청비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정수남이는 다른 아이들보다도 몸이 크고 건장하였다. 대감 부부가 일 잘하게 생겼다고 좋아했으나, 커가면서 무슨 불만이 있는지 일을 잘 하려 하지 않고 먹는 것만 밝혔다. 틈만 나면 빈둥빈둥거려서 주인의 속을 썩혔다. 특히 자청비 보는 앞에서는 좀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빈둥거려도 그가 일한 분량이 다른 하인만큼은 됐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자청비가 열다섯살이 됐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자청비가 베틀에 앉아서 비단을 짜고 있는데 정수남이의 어머니인 정술데기가 옆에 와서 일을 도왔다. 그런데 자청비가 문득 보니 정술데기의 손이 희고 고왔다. 그걸 보고서 자청비가 정술데기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나이가 마흔이 다 됐는데 어찌 그리 손이 하얗고 고운가요?"
 "아기씨. 다 이유가 있지요. 매일마다 남쪽 주천강 여울에 가서 빨래를 하다 보니 손이 이렇게 하얗게 됐답니다."
 꾸민 말이었지만, 자청비는 그 말을 곧이듣고서 빨래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면 나도 주천강 여울에 가서 빨래를 할래요."
 자청비는 바구니에 옷을 가득히 담아서 박씨 같은 발걸음으로 총총히 주천강 여울로 향하였다. 물가에 도착한 자청비가 빨래에 열중하고 있는데, 마침 한 도령이 책을 끼고서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였다.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저런 고운 아가씨를 놓아두고 어찌 그냥 지나가리. 말이나 한번 건네보자.'
 문도령이 자청비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아가씨, 길 가던 사람인데 목이 말르니 물 한 바가지만 떠주시겠어요?"
 빨래를 하던 자청비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수려하게 생긴 도령이 서있다.
 "깜짝 놀랐어요. 내 떠드리지요."
 자청비는 가지고 있던 빨래 방망이로 물을 휘휘 저어 헤친 다음 큰 바가지에 물을 하나 가득 받더니 물가에 선 수양버들의 잎을 세번이나 훑어서 물에 띄운 다음 문도령에게 건네주었다. 바가지를 받은 문도령이 '이게 웬 심술인가' 싶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청비를 바라보니, 자청비가 웃으며 말한다.
 "급한 김에 훌떡 물을 마시다가는 체하시는 법입니다. 잎사귀를 불면서 천천히 드세요."
 "그런 뜻이 있었군요.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도령님은 누구시고, 어디를 가시는 길인가요?"
 "나는 본래 하늘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문도령이라고 합니다. 이 주천강 건너 저 남쪽 마을에 사시는 거무선생이라는 분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하늘에까지 퍼져 이제 3년을 기약하고 글공부를 하러 가는 길이랍니다."
 그 말을 들은 자청비는 자기도 문도령과 함께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얼른 말을 꾸며냈다.
 "도령님, 마침 잘 됐군요. 우리 집에 나하고 똑같이 생긴 쌍동이 남동생이 있는데, 우리 동생도 거무선생을 찾아가서 글공부를 하려는 참이랍니다. 길이 가깝지 않은데 우리 동생하고 동행하도록 하세요."
 내심 자청비 곁에 좀더 머무르고 싶었던 문도령이 얼른 허락했다.
 "잘됐네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자청비는 얼른 빨래를 헹구어 바구니에 담은 다음 문도령을 이끌고 마을로 향하였다. 자청비는 문도령을 마을 입구에 기다리도록 하고서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께 고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글공부를 하도록 해주세요."
 "아니, 일하는 것만 좋아하던 네가 갑자기 공부라니? 그건 갑자기 웬 말이냐?"
 "아버지, 부모님 자식이라고는 저 하나뿐인데 저 아니면 부모님 제사 때 누가 축문을 쓰겠습니까? 공부를 하게 해주세요."
 "어허, 이제 네가 철이 들었나 보구나. 좋도록 해라. 그래 선생을 대줄까?"
 "아닙니다 아버지. 듣자 하니 주천강 너머 거무선생이라는 분이 훌륭하다고 소문이 자자합디다. 남장을 하고 그분께 찾아가서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좋을 대로 하려무나."
 허락이 떨어지자, 자청비는 그 길로 남자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김진국 대감이 읽던 책을 아무거나 한 아름 안고서 한 손에 가득 붓을 들고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마을 밖에 기다리고 있던 문도령에게로 가서 말을 건넨다.
 "저, 혹시 문도령 아니십니까? 우리 누님이……."
 "예 제가 문도령입니다. 아까 그분의 동생이시군요."
 "예, 저는 주년뜰 사는 자청도령이라고 합니다. 듣자 하니 거무선생께 글공부를 하러 가신다니 저하고 함께 가시도록 하지요."
 "예, 좋습니다."
 동행이 되어 길을 떠난 문도령과 자청비는 거무선생에게로 가서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둘은 같은 대청에서 글을 읽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면서 서로 형제같이 친하게 지냈다.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 1년, 2년이 흘렀는데, 문도령은 가끔씩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자청도령이 행동거지는 자기보다도 활달한 게 남자가 분명한데, 그 용모나 음성은 아무래도 남자 같지가 않았다. 뒷간 갈 때나 목욕할 때 다른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유심히 자청도령의 모습을 관찰하였다. 자청비가 또한 그 낌새를 알아차렸다.
 하루는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데 자청도령이 자기하고 문도령 사이에 물을 담은 대야를 놓고 그 위에 은젓가락과 놋젓가락을 걸쳐놓는다. 이상하게 생각한 문도령이 물었다.
 "아니, 왜 대야에다가 젓가락을 걸쳐 놓고 자는가?"
 "아버지 말씀이 문득 생각나서 그리한 거라네. 대야 위의 젓가락이 떨어질 정도로 잠을 자면 글이 둔하다더군."
 그 말을 들은 문도령은 자신도 한번 해보겠다며 대야 위에 젓가락을 얹어 자청도령의 대야 옆에 놓고서 잠을 청하였다. 그 대야 때문에 문도령은 자청비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젓가락이 떨어질까 염려하느라고 잠이 깊이 들지를 못하는 것이다. 건너편의 자청도령은 신경도 안 쓰는지 잠을 쿨쿨 잘만 잤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자 문도령은 잠이 부족하여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동안 거무선생의 여러 제자 가운데 문도령과 자청도령이 제일 뛰어나 막상막하였는데, 점차 문도령이 처지기 시작하여 자청도령이 으뜸 제자가 되었다. 마음이 상한 문도령이 하루는 자청도령에게 시합을 청하였다.
 "공부는 몰라도 딴 재주는 나한테 못 당할걸. 어디 나하고 오줌발 멀리 보내기 시합을 한번 해볼텐가?"
 자청도령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그러자고 허락하였다.
 먼저 문도령이 나서서 오줌을 누는데, 그 나간 거리가 열두자 반이었다. 의기양양한 문도령. 다음에 자청도령이 나서는데 미리 준비해 두었던 죽순 대롱을 통하여 오줌을 내보내니 그 나간 거리가 스무자 반이었다. 문도령은 이제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혹시 자청도령이 여자가 아닐까 의심했던 것도 다 풀어지고 말았다.
 그럭저럭 공부를 시작한 지 삼년이 다 돼가던 어느날이었다. 하늘에서 웬 새 한마리가 날아 내려와 입에 물었던 편지를 떨어뜨렸다. 주워 보니 하늘나라에 있는 문도령의 부모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문도령아. 이제 3년 글공부를 마쳤으니 돌아와 결혼을 하거라. 서수왕아기를 네 색시감으로 정해 두었다."
 문도령이 자청도령에게 그 말을 전하면서 이제 그만 헤어질 때가 됐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자청도령이 놀라면서 자기도 이제 공부를 그만두고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거무선생 및 여러 제자들과 하직하고 길을 나섰다. 가던 길에 주천강에 도착하니 자청비가 문도령에게 말하였다.
 "이제 저 강을 건너면 이별이군. 그나저나 우리 이 물에서 묵은 때나 씻고 갈까?"
 "그래, 좋은 생각이야."
 문도령은 아랫쪽에, 자청비는 저 윗쪽에 자리를 잡고 목욕을 시작하는데, 자청비는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물소리만 내더니 버드나무 잎새를 따서 뭐라고 편지를 써 물 위에 띄우고 나서 집으로 향하였다. 아래에서 목욕을 하던 문도령이 버드나무 잎을 발견하고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살펴보니 웬 글이 써있다.
 "눈치 없는 문도령아, 멍청한 문도령아. 삼년간 한방을 쓰고도 눈치 모른 문도령아."
 놀란 문도령이 윗쪽을 보니 자청비가 벌써 옷을 입고 나서서 저 멀리 가고 있는 것이었다. 문도령이 서둘러 옷을 입는데 윗도리는 어깨에 걸리고 바지가랑이 하나에 두 다리가 들어간다. 급히 자청비의 뒤를 따르는데, 멀리 보이는 자청비 뒷머리가 삼단같이 길고 곱다. 문도령이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가니, 발에 콩알처럼 물집이 잡히고 머리로는 방울방울 굵은 땀이 흘렀다.
 집에 당도한 자청비가 오던 길을 살펴보니 멀리 문도령이 엎어지며 일어나며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동안 몰래 문도령을 사모했던 마음에 야속한 마음과 가엾은 마음이 한데 얽힌다. 그는 문도령에게로 다가가서 말하였다.
 "문도령님아. 제가 여자의 몸으로 오늘까지 도령님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따라오시다니요.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어 가도록 하세요. 제가 부모님께 한번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자청비가 부모님을 찾아서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래 그 동안 3년 공부에 아픈 곳은 없었느냐? 어쩜 그리 소식도 뜸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 동안 더 늙으셨군요. 저는 편안히 공부 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청비가 덧붙였다.
 그런데 부모님, 지금 집 밖에 3년 동안 저하고 같이 공부한 도령이 있는데, 발이 콩구슬처럼 부푼 데다 벌써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머물도록 해주세요."
 "그래, 그 나이가 열 다섯이 넘었더냐, 안 넘었더냐?"
 문도령의 나이는 자청비와 같은 열여덟이었으나 자청비는 문도령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짐짓 딴전을 피웠다.
 "아마 아직 열다섯이 안 됐을 겁니다."
 "그래, 그럼 네 방에 함께 머무르도록 해라."
 부모님 허락을 받은 자청비가 남자 옷을 벗어놓고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문도령을 맞아들인다. 문도령이 보니 3년 전에 주천강가에서 볼 때보다도 그 모습이 더 성숙하고 아름다웠다. 둘은 손을 맞잡고 자청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는 비단 베틀을 보자 자청비가 반가운 마음에 선뜻 뛰어올라 옷을 짜니, 그 모습을 보며 문도령이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날밤 자청비와 문도령은 밤을 꼬박 새우면서 마음속에 담았던 정회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서로 굳게 사랑을 다짐하였다. 어느새 닭이 울고 날이 밝아 문도령이 떠날 때가 되자 자청비가 문도령에게 말하였다.
 "이제 하늘나라로 올라가면 언제나 오실 건가요?"
 "내가 박씨를 하나 주고 갈께요. 내년 봄에 이 박씨를 심어서 열매가 익어서 따게 될 때까지는 꼭 돌아오리다."
 "아쉬우니 정표라도 하나 주고 가세요."
 문도령은 가지고 있던 상동나무 머리빗을 반으로 쪼개어 한쪽은 자청비에게 주고 한쪽은 자기가 간직하고서 하늘나라로 길을 떠났다.
 문도령이 떠나고 나서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지났다. 그리고 기다리던 봄이 왔다. 자청비는 문도령에게서 받은 박씨를 자기 방 뒷뜰에 심었다. 얼마 후 싹이 트더니 점차 줄기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름이 되자 지붕 위에 올라온 박넝쿨에 하나 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열매가 점점 커져가는데도 문도령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드디어 열매가 항아리만큼 커져서 딸 때가 되었는데도 끝내 문도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청비가 시름에 겨워 뜰을 거닐면서 울 밖을 살펴보니 한 농사꾼 부부가 산에 갔다 오는지 남자는 나무를 한 짐 해지고서 지게에 꽃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고, 여자는 머리에 꽃을 꽂고서 그 뒤를 따른다. 그 모습을 보니 자청비는 웬지 심통이 나는 것이었다. 마침 집 한 구석에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난 정수남이가 퍼질러 앉아서 바지 춤을 뒤적이면서 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자청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정수남이에게 말했다.
 "정수남아. 이 지저분한 녀석아. 너는 남의 집 하인으로서 밥만 퍼먹고 이를 잡고 있단 말이냐? 저 사람들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오는 것도 안 보이니? 어서 나가서 나무라도 한 지게 해가지고 오너라."
 그러자 정수남이가 실퉁맞은 표정으로 대꾸한다.
 "상전님아. 이 꼴이 그리 보기 싫거든 말 한마리와 소 아홉 마리와 도끼, 잠뱅이를 챙겨 주오. 그러면 내 깊은 산속에 가서 한 달간 땔 나무를 바리 바리 해가지고 오리다."
 그 말을 들은 자청비가 말과 소, 도끼 따위를 준비해서 주니 정수남이가 말을 타고 소떼를 몰아 굴미굴산 깊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떠났다. 숲속에 도착한 정수남이는 나뭇가지에 말과 소를 매놓고서는 나무를 하기는 커녕 누워서 낮잠만 자는 것이었다. 자다 깨면 또 자고 깨면 또 자고 하는데, 어찌나 잠을 오래 잤는지 몇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정수남이가 마침내 기지개를 펴며 잠에서 깨고 보니 며칠 동안 나무에 매여 있던 소와 말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다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정수남이는 주변에서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는 죽어 넘어진 소의 가죽을 하나하나 벗긴 다음 소를 통째로 불에다가 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익었는가 어쩐가 하면서 고기를 떼어먹는데, 그렇게 한점 한점 먹다보니 한 나절 만에 소 아홉 마리를 온데간데 없이 다 먹어 치우고 말았다.
 "모처럼 한번 포식을 했군. 그나저나 집에 가서 뭐라고 하나?"
 정수남이가 소가죽과 말가죽을 짊어지고 도끼를 들고 잠뱅이를 입고서 숲을 나서서 내려오는데, 마침 근처 연못에 오리가 한 마리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옳지. 우리 상전이 고운 것을 주면 좋아하니 저 오리나 잡아다 바치고 밥이라도 얻어먹어야겠다."
 그러면서 정수남이가 어깨에 맸던 도끼를 꺼내 멀리 오리에게 던지니 오리는 날아가고 도끼는 물 밑에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정수남이가 도끼를 찾으려고 잠뱅이를 벗어놓고서 물속을 이리저리 뒤졌지만 도끼를 찾을 수가 없다. 그가 지쳐서 연못에서 나와 보니 아뿔싸, 웬 도둑이 말가죽 소가죽과 잠뱅이까지 다 챙겨서 도망가 버린 뒤였다.
 "어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정수남이는 칡덩굴과 떡갈나무 잎 따위를 대충 얽어서 몸을 가리고는 남들의 눈을 피해 소롯길로 해서 날이 저문 시간에 자청비의 집에 당도하였다. 그리고는 차마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장독대에 숨어들었다. 마침 정술데기가 장독대에 간장을 푸러 와서 보니 인기척과 함께 이상한 물체가 보인다. 놀란 정술데기가 뛰어와서 자청비에게 말하였다.
 "아이고 아기씨, 우리 장독대에 귀신이 생겼습니다."
 자청비가 정술데기를 이끌고 장독대에 와서 말하였다.
 "이봐라. 사람이냐 귀신이냐? 귀신이면 썩 꺼지고 사람이거든 내 눈 앞에 나서거라."
 그러자 정수남이가 말했다.
 "귀신이라뇨? 저 정수남입니다."
 그러면서 정수남이가 험한 꼴을 드러내니 자청비가 놀라 말했다.
 "아니, 소를 아홉 마리나 끌고 간 녀석이 이게 웬 일이란 말이냐? 대체 어찌 된 꼬락서니냐?"
 그러자 정수남이가 말을 꾸며댔다.
 "상전님아, 너무 그러지 마오. 글쎄 내가 굴미굴산 깊은 산중에 들어가 한 곳에 당도해 보니 전에 우리집에 왔던 문도령님이 하늘나라 선녀들을 거느리고 내려와 신선놀음을 하고 있지 않겠소? 그래 그 구경을 하다 보니까 소하고 말이 다 간 곳이 없어집디다. 또 내려오다가 연못에 오리가 있길래 오리를 잡으려다가 도끼를 잃어버리고, 또 도끼를 찾다가 잠뱅이까지 도둑맞아 이 꼴이 되지 않았겠어요."
 자청비가 문도령이라는 한 마디 말에 깜짝 놀라서 말했다.
 "뭐라고? 문도령님이 오셨단 말이더냐? 그래 언제 또 내려오신다더냐?"
 "내일 오후에 또 오겠다고 합디다."
 "혹시 내 말은 않더냐?"
 "아기씨님을 꼭 모시고 오라고 합디다."
 그 말을 들은 자청비는 소와 말을 잃은 것도 다 잊고 마음이 들뜨고 말았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가서 만나봐야지. 네가 길을 인도하거라."
 다음날 자청비는 정수남이를 앞세우고 굴미굴산 깊은 산을 향해 길을 나서게 되었다. 자청비가 말을 타려고 하는데, 정수남이가 안장 밑에 소라껍질을 넣어 놓았던지라 말이 날뛰었다. 자청비가 정수남이에게 말하였다.
 "아니, 말이 날뛰니 이게 웬일이냐?"
 "상전님아, 말이 오늘 화가 났나 봅니다. 상전님이야 굴미굴산 들어가면 도령님을 만나겠지만 이 말이야 무슨 좋은 일이 있겠어요? 화가 날 수밖에요."
 "그러면 이를 어쩌지?"
 "제가 한번 길들여 보지요."
 정수남이는 안장 밑의 소라껍질을 몰래 빼낸 다음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채찍을 놓으니 말이 구름같이 달려간다. 자청비가 서둘러 그 뒤를 따르는데, 정수남이는 자청비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말을 달렸다. 그렇게 가기를 한 나절 만에 굴미굴산 숲속에 이르렀다. 정수남이가 거기서 말에서 내려 태평하게 누워 있으니 자청비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뒤쫓아온다. 발에 병이 나고 옷이 다 해어질 지경이었다.
 "아니 이놈아. 네녀석이 말을 타고 오면 난 어쩌란 말이냐?"
 "상전님아, 그런 말씀 마오. 겨우 말을 길들였는데 말머리를 돌리면 또 날뛸가봐 할수없이 여기까지 온 거라오."
 "그건 그렇고 배가 고파 못 견디겠다. 우리 가지고 온 음식이나 먹어 보자."
 그러자 정수남이가 메밀범벅을 내놓아 반씩 나누어 먹게 되었다. 자청비가 떡을 씹는데 어찌나 짠지 삼킬 수가 없다. 정수남이가 일부러 자청비 몫에만 소금을 한 웅큼 집어넣었던 것이다.
 "아이고 도저히 짜서 못 먹겠다. 이놈아, 네것을 이리 가져와 봐라. 그거나 먹어 보자."
 "상전님아, 그게 무슨 말이요? 부부나 한 음식을 나눠먹는 것이지 어찌 상전님이 종하고 한 음식을 드신단 말씀이오."
 그는 그렇고, 자청비는 짠 음식을 입에 넣었던 탓에 목이 말라서 목 견딜 지경이었다.
 "정수남아. 목이 말라 못 참겠으니 물이나 찾아 봐라."
 "이리로 하여 돌아가면 물이 있습니다."
 과연 한쪽으로 가 보니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자청비가 달려가 손으로 물을 떠 먹으려 할 때 정수남이가 말하였다.
 "상전님아. 이곳이 바로 문도령 놀던 곳이라오. 저기 물속을 한번 살펴보오. 저기 구름 그림자가 아롱아롱한 속에 문도령이 선녀들하고 노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 말을 들은 자청비가 비로소 정수남이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돌아보니 그가 음흉한 눈빛을 지으며 말한다.
 "상전님, 문도령 돌아오기는 벌써 글렀오. 그러지 말고 당장 나하고 결혼하여 같이 삽시다. 내 행복하게 해주리다."
 자청비는 꼭 독 안에 갇힌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의 흔적도 없는 곳에 단 둘뿐인지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말을 듣지 않다가는 그 우악스런 손길에 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하였다. 자청비가 얼른 말을 꾸몄다.
 "그래, 이렇게 된 일 어쩌겠니. 그렇게 하자꾸나. 그러나 밤을 지내려면 움막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 돌을 모아다가 얼른 움막이나 지어 보자."
 그러자 정수남이 나서서 돌을 주워오고 나무를 잘라오는데, 그 행동이 민첩하기 짝이 없었다. 금방 재료를 모아놓더니 돌로 담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청비는 일을 돕는 척하면서 이쪽 저쪽을 다니며 돌 쌓은 것을 헐겁게 만들거나 구멍을 냈다. 이쪽을 땜질하면 다시 저쪽을 건드렸다. 밤새 그렇게 하다보니 움막이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날이 밝고 말았다. 정수남이 화가 나서 펄쩍 펄쩍 뛰었다.
 "아직도 날이 많은데 무얼 그리 서두니?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봐라. 내가 이를 잡아 주마."
 그 말에 정수남이는 마음이 풀려 자청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자청비가 그의 멧방석 같은 머리를 헤치면서 이를 잡는데 굵은 이는 장수로, 작은 이는 군졸로 살려두고 중간 크기 이를 골라서 죽이는 듯 마는 듯하고 있으니, 밤잠을 못 잔 정수남이가 어느새 소록소록 잠이 들고 말았다. 자청비가 그 손아귀를 벗어날 계책을 생각하던 끝에, 사람의 정수리를 찌르면 기절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자청비는 옆에 있던 나무의 뾰족한 가지를 잘라서는 눈을 찔끔 감고서 정수남이의 정수리를 푹 찔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속이 상한 김에 너무 세게 찔렀는지, 갑자기 정수남이가 입에 피를 흘리며 고개를 힘없이 떨구는 것이다. 놀란 자청비가 맥을 짚어 보았으나 이미 숨을 거두고 난 다음이었다. 자청비가 당황해하고 있는데 정수남이의 죽은 몸에서 갑자기 부엉새 한 마리가 생겨나 자청비를 쏘아보고는 날아 올라갔다.
 정수남이의 시신을 대충 수습해서 묻은 자청비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 부모님이 불러서 말하였다.
 "아니 종을 데리고 서둘러 길을 떠나더니 이제 너 혼자 돌아오니 어찌 된 일이냐?"
 자청비는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벌써 나이 일흔이 다 되어 망녕기가 조금 있었던 아버지가 크게 꾸짖었다.
 "이년아! 그게 무슨 말이냐. 계집아이가 사람을 죽이다니 이런 괴이한 일이 있나? 너같이 부정한 년을 우리 집에 둘 수 없다. 어서 썩 나가라."
 "아버지, 아버지는 자식보다도 종이 더 중하단 말씀입니까?"
 "이년아, 너는 시집 가면 그만이지만 그 종은 죽을 때까지 우리 집을 위해서 일을 할 사람이다. 그걸 모른단 말이냐? 썩 나가거라."
 옆에서 어머니가 말렸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자청비 또한 아버지에게 더이상 매달리지 않고 남자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집을 나와서 길을 떠났다.
 자청비가 이곳 저곳을 지나며 여러 날을 걷다가 하루는 한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을의 모습이 엉망이었다. 나무와 풀이 다 시들어지고 들판의 곡식이 다 병들어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이게 다 웬 부엉새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을에 김장자라는 부잣집이 있는데, 그 집 뒷동산에 부엉새가 날아든 뒤로 마을에 온갖 흉한 일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김장자 집은 어떤 집인고 하니 언젠가 한락궁이라는 소년으로부터 저승세계 서천꽃밭에서 가져온 신기한 꽃들을 얻어서 집안식구가 모두 장수하면서 큰 부자로 살아온 집이었다.
 자청비가 혹시나 하고 김장자 집 뒷동산을 찾아가서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부엉새는 정수남이의 죽은 넋이었다. 자청비가 어찌할까 하고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데 미참 어린 아이 셋이 다투는 모습이 보였다. 가 보니 새 한마리를 잡아서는 서로 갖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자청비가 말하였다.
 "그러지 말고, 내가 돈을 세 푼 줄테니 한 푼씩 나눠갖고 그 새를 나한테 주거라."
 돈을 받은 아이들이 좋아하면서 새를 자청비에게 주었다. 자청비는 그 새에 화살을 꽂아김장자 집에 던져 넣고는 문을 두드렸다. 사람이 나오자 자청비가 말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나는 새를 한 마리 쏘아서 이 집안에 떨어졌는데, 화살이라도 찾을까 해서 왔습니다."
 자청비가 하인을 따라 한쪽으로 가니 과연 새 한 마리가 화살이 꽂힌 채로 죽어 있었다. 그러자 하인이 자청비를 잠깐 머무르게 하고 김장자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김장자가 자청비를 청하여 말하였다.
 "보아하니 활을 잘 쏘시는가 본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 뒷동산에 웬 부엉새 한 마리가 든 뒤로 평화로웠던 집안과 마을 꼴이 말이 아니게 됐습니다. 그 새를 잡아 주신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다 드리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마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날 밤 자청비는 사람들이 다 잠 들었을 무렵에 뒷동산으로 가서 부엉새를 보면서 말하였다.
 "정수남아 정수남아. 네가 나 때문에 원한이 맺혔구나. 네 어찌 나를 범하려 했단 말이냐? 내가 네 원한을 풀어줄테니 내 품으로 내려와 앉거라."
 그러자 부엉새가 풀풀 날아서 자청비의 가슴에 와 안겼다. 자청비가 부엉새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날 아침에 자청비가 부엉이를 안고 가서 김장자에게 말하였다.
 "제가 어젯밤에 이렇게 부엉이를 산 채로 잡았습니다. 이제 이 마을에는 우환이 없을 겁니다. 이제 약속대로 제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자님께서 서천꽃밭의 신이한 꽃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부엉새가 날아든 이유가 바로 그 꽃 때문이지요. 꼭 쓸 데가 있으니 환생꽃을 저에게 주세요."
 서천꽃밭의 신이화들은 장자가 가장 아끼던 것이었고 특히 환생꽃은 보물 중의 보물이었지만 이미 약속한 일인지라 장자는 환생꽃을 내주었다. 그러자 자청비는 꽃을 간직한 채 부엉이를 안고서 길을 떠나 굴미굴산 깊은 산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에 정수남이를 묻은 곳으로 가서 그 시신을 살폈다. 죽은 지 여러날이 됐는데도 죽을 때 모습과 별로 변함이 없었다. 자청비는 김장자 집에서 가지고 온 환생꽃을 꺼내어 정수남의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죽나무 막대기로 몸을 세번 두드렸다. 그러자 정수남이가 멧방석 같은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아이고 상전님, 낮잠을 너무 오래 잤습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앞장을 섰다.
 "상전님, 어서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예전의 그 행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상냥한데다가, 움직이는 품이 부지런하였다. 죽었다 깨어난 사이에 새 사람이 된 것이었다. 자청비가 그 넋을 위로해 준 덕이었다.
 정수남이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온 자청비가 아버지를 찾아뵙고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가 자식보다 아까워한 종을 살려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망녕기가 더 심해진 아버지 말씀이 뜻밖이었다.
 "뭐라고? 이년! 네가 사람을 죽였다가 살렸다가 하다니 요망하기 짝이 없구나. 너는 영락없이 집안을 망칠 년이다. 집안에 들 생각일랑 말고 어시 이 집을 떠나거라."
 망녕든 아버지를 불쌍히 여긴 자청비가 좋은 말로 달래고 어머니와 정수남이가 옆에서 도왔지만 아버지는 그럴수록 더욱 화를 냈다. 자청비는 할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집을 나오고 말았다.
 집을 나선 자청비는 다시 해동국을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갈곳없이 헤매었다. 사람들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나갔다. 생각할수록 한번 떠나고는 돌아오지 않는 문도령이 야속하였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그가 있는 곳은 저 먼 하늘나라였다.
 하루는 자청비가 산중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이에 날이 저물고 말았다. 유숙할 곳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던 자청비는 불빛을 하나 발견하고 그리로 향하였다. 집에 당도하여 보니 안에서 베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청비가 반가운 마음에 주인을 찾으니 웬 할머니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아니 이 깊은 산중에 웬 처년고? 어서 들어오너라."
 "고맙습니다 할머니. 그런데 이 깊은 산속에 할머니 혼자 사세요?"
 "응. 여기는 주모산이고 사람들이 나더러 주모할머니라고 부르지. 여기서 혼자 옷 짜면서 사는 재미도 나쁘지 않단다."
 "어디 제가 한번 도와 드려 볼까요?"
 그러면서 자청비가 베틀에 앉아서 옷감을 짜기 시작하는데, 주모할머니가 보니 솜씨가 자기에 못지 않다. 할머니가 놀라서 말하였다.
 "아니, 이 젊은 처녀가 어찌 이렇게 솜씨가 좋을꼬? 나보다 더 낫구나."
 "저는 원래 어려서부터 옷 짜는 것을 좋아했답니다. 그러나 저러나 할머니 이 옷감을 어디다 쓸건가요."
 "응. 자랑 같지만 내 솜씨가 하늘나라까지 소문이 났는지 요즘에는 하늘나라에서 쓸 옷을 짜고 있단다. 저건 하늘나라 문도령이란 분이 혼인할 때 쓸 옷감이지. 서수왕아기하고 짝을 맺는다지, 아마."
 그 말을 들은 자청비가 문득 눈물을 보였다.
 자청비는 그날부터 주모할머니의 수양딸이 되어 함께 살면서 옷 짜는 일을 돕게 되었다. 문도령 입을 옷을 자청비가 맡아서 짰다. 자청비는 옷감이 다 돼갈 무렵에 옷감 끝에다가 살짝 '가련하다 자청비, 불쌍하다 자청비' 하는 말을 새겨 두었다.
 다음날 주모할머니는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옷감을 받은 사람들이 다들 칭찬한다.
 "이번 옷감은 유난히 곱구려. 흉내낼 수 없는 솜씨야."
 이때 문도령이 옷감을 살펴보다가 한 곳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몸을 부르르 떨고는 주모할머니에게 말하였다.
 "할머니, 이 비단을 누가 짠 거죠?"
 "내 수양딸 자청비가 짠 거라오."
 그러면서 주모할머니가 문도령에게 대충 사연을 말해 주었다. 하늘나라에 돌아온 후 경황이 없어 미처 자청비를 챙기지 못했던 문도령이 갑자기 세상에 두고 온 자청비가 불쌍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가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내일 밤에 내가 찾아간다고 전해 주세요."
 주모할머니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자청비는 기쁨에 들떴다. 그녀는 곱게 옷을 차려입고 문도령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주모할머니 집에 내려온 문도령이 방에 들어가려다가,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자청비가 맞는지 확인해 보려고 손으로 방문 창호지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마침 안에서 방문을 바라보고 있던 자청비가 난데없는 손을 발견하고는 무심결에 바늘을 들어 손가락을 톡 찔렀다. 피가 한 방울 똑 떨어졌다. 그러자 깜짝 놀란 문도령이 손을 빼고는 그냥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주모할머니가 자청비에게 문도령이 왔었는지 물으니 자청비가 말하였다.
 "문도령은 안 오고 누군지 방안을 엿보려고 구멍을 내길래 손가락을 바늘로 찔렀죠."
 "이런 철없는 아이 같으니. 그분이 바로 문도령이셨다. 그런 일을 당하고서 어찌 너를 진짜 애인으로 알겠느냐? 보아하니 네가 이렇게 차분하지 못하고 말썽을 자꾸 피워서 집에서 쫓겨난 게로구나. 나도 너 같은 아인 필요없으니 어서 떠나거라."
 자청비는 하릴없이 다시 주모할머니 집에서 쫓겨나왔다. 그리고 다시 이곳 저곳을 방황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하루는 자청비가 깊은 산속을 걷고 있는데, 난데없는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 보니 웬 선녀들이 모여서 한숨을 쉬며 울고 있었다. 자청비가 그 이유를 물으니 선녀들이 대답하였다.
 "저희들은 하늘나라 문도령님을 모시는 시녀들이지요. 문도령님이 얼마 전에 지상에 다녀오시더니 자청비가 보고 싶다며 그녀와 함께 목욕하던 물을 떠오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느 물인지 알 수 없어 방황하다가 힘이 들어서 울고 있답니다."
 그러자 자청비가 말하였다.
 "저런, 제가 바로 그 자청비랍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제가 그곳을 알려드리지요."
 자청비는 시녀들을 이끌고 옛날에 문도령과 함께 몸을 씻었던 주천강 여울로 갔다. 물을 떠 담은 선녀들이 고마워하자 자청비가 말하였다.
 "선녀님. 제가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제발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주세요. 문도령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그럼 저희들을 따라오세요."
 자청비는 선녀들을 따라 깊은 산속 연못으로 가서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서 하늘나라에 올랐다. 그리고는 몰래 문도령이 산다는 집으로 가서 팽나무 위에 몸을 숨겼다.
 그날 밤 문도령이 나와서 달을 보면서 한숨지었다.
 "저기 저 달이 곱기는 하다만 지상에 있는 자청비만은 못하구나."
 그러자 나무 위에서 자청비가 응답하였다.
 "저기 저 달이 곱기는 하지만 내 사랑 문도령님만은 못하구나."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문도령이 밖에 나가 나무를 살펴보니 자청비가 올라앉아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부여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문도령은 자청비를 몰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방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찾아가서 말하였다.
 "부모님, 제 말씀을 한번 들어보세요. 묵은 옷이 따뜻합니까, 새 옷이 따뜻합니까?"
 "새 옷은 남 보기는 좋지만 따뜻함은 묵은 것만 못한 법이지."
 "새로 만든 장이 답니까, 묵은 장이 답니까?"
 "그거야 묵은 장이 더 달지."
 "그러면 새 사람이 좋습니까, 묵은 사람이 좋습니까?"
 "새 사람은 이리저리 재빨리 움직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든 사람만은 못한 법이란다."
 "그러면 부모님, 저는 서수왕아기에게 장가를 들지 않겠습니다. 그전에 미리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도령은 부모님께 자청비를 인사시키고 그간의 사연을 말하였다. 부모님은 어이없어 하였지만 두 사람의 뜻이 워낙 굳은 것을 보고 할수없이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문도령 집에서 서수왕아기에게 혼인 약속을 무르는 편지를 보내니, 서수왕아기가 화를 내어 편지를 비벼서 불에 태워 물에 타 먹고는 방안에 들어가 문을 잠고 드러누웠다.
 며칠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서수왕아기 몸에서 새가 나는데, 머리에서는 두통새, 눈에서 흘깃새, 코에서 악심새, 입에서 헤말림새가 나왔다. 그때 이후로 사이좋던 부부간에도 이 새가 들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혼례를 할 때 신부가 상을 받으면 숟가락을 들기 전에 이 새들 몫으로 음식을 조금씩 걷어서 상 밑에 내려놓는 풍습이 생겼다.
 한편 자청비는 문도령과 결혼하여 금슬 좋게 나날을 지냈다.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 색시가 좀 덜렁대긴 하지만 착하고 일도 잘 한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자청비가 하늘나라를 다니면서 농사짓는 것을 보니 인간세상에서 보지 못하던 좋은 곡식들이 많았다. 그녀는 그것을 인간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옥황상제께 청하여 허락을 받고는 문도령의 도움으로 여러 곡식의 씨를 모아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다. 옛날 살던 집에 와 보니 하늘나라에 한 달간 있는 동안에 인간세상에는 벌써 삼십년이 흘러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쉰살이 다 된 정수남이가 사람들을 이끌고 농사일을 돌보고 있었다. 정수남이가 부지런히 일한 덕으로 사람들이 전보다 잘 살고 있었지만, 아직도 곡식이 부족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청비는 부모님 제사를 치른 다음, 정수남이에게 하늘에서 가져온 곡식 종자들을 주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정수남이가 그 씨앗들을 심어 수확하니, 소출이 전보다 훨씬 많아서 먹고 사는 일이 수월해졌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자청비가 씨앗들을 전할 때 메밀씨를 빠뜨렸다가 늦게 전하는 바람에 메밀은 다른 곡식보다 늦게 심고 늦게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옥황상제는 문도령과 자청비로 하여금 인간세상의 농사를 돌보는 세경신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고 정수남이의 죽은 영혼을 또한 신으로 만들어 인간세상에 머물러 사람들의 공양을 받으면서 문도령과 자청비의 일을 도와 농사일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농사를 지어 곡식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 세 신 덕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