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도령은 서천꽃밭으로 훌훌 떠나고, 그날부터 원강암이의 종살이가 시작됐다. 날이 저물어 한밤중이 되자 자현장자가 원강암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 문을 열어라.” “이 고을 풍습은 어찌하나 몰라도, 우리 마을 풍습은 아기나 낳은 뒤에야 몸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자현장자는 순순히 돌아갔다. 얼마 안 되어 원강암이는 아들을 낳았다. 사라도령의 말대로 ‘신산만산할락궁이’라 이름 지었다.
자현장자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원강암이는 말했다.
“이 고을 풍습은 어찌하나 몰라도, 우리 마을 풍습은 낳은 아기 백일이 넘어야 몸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이번에도 자현장자는 순순히 돌아갔다. 백일이 넘었다. 자현장자가 다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이 고을 풍습은 어찌하나 모르지만, 우리 마을 풍습은 낳은 아기가 걸음마를 하고 마당에서 놀음놀이를 해야 몸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할락궁이가 제법 자라서, 마당에서 막대기로 말타기를 하며 놀게 된 어느 날, 다시 자현장자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
“이 고을 풍습은 어쩌나 모르지만, 우리 마을 풍습은 낳은 아기 열다섯 살이 되어야 몸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그러면 그러자꾸나.”
의외로 순순히 돌아가는 자현장자를 보며 원강암이는 무슨 일이 일어날 듯 무척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부터 모자에게 엄청난 고역이 떨어졌다.
할락궁이에게는 낮이면 소 쉰 마리를 몰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나무 쉰 바리를 해오게 하고, 밤에는 새끼 쉰 동을 꼬아놓게 했다. 원강암이에게는 낮이면 명주 다섯 동, 밤에는 명주 세 동을 짜 올리도록 했다. 매일 밤낮없이 이어지는 고역에 모자는 날마다 눈물로 세수를 하며 힘들게 살았다.
어느 덧 열다섯 살이 된 할락궁이는 눈치로 집안 분위기를 짐작하고 어느 날 어머니에게 캐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디 갔습니까?”
원강암이는 사실대로 말하면 아들마저 떠날 것 같아 불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