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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믄장아기

옛날 옛적에 ‘강이영성이서불이’라는 남자거지는 윗마을에 살고, ‘홍은소천궁에궁전궁납’이라는 여자거지는 아랫마을에 살았다.

흉년이 든 어느 날, 자기 마을에서 얻어먹기가 쉽지 않았던 두 거지는 저마다 길을 떠났다. 윗마을 남자거지는 아랫마을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랫마을 여자거지는 윗마을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들어 서로 얻어먹으러 나섰던 것이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연분이 있는 법, 도중에서 만난 두 거지는 부부가 됐다. 부부는 거지 짓을 그만 두고 힘을 합쳐 품팔이 나섰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

그러다 딸아이가 태어났다. 가뜩이나 가난한 데다 일가친족도 없는 부부는 아이 키울 걱정에 탄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주었다. 정성을 들여 은그릇에 죽을 쑤어다 먹이고, 밥을 해다 먹이며 딸아이를 키워 주었다. 아이 이름은 은그릇으로 밥을 먹여 키웠다 해서 ‘은장아기’라 불렀다.

부부는 두 해를 넘기고 또 딸을 낳았다. 이번에도 마을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첫아이만큼 정성을 들이지는 않아 놋그릇에 밥을 해다 먹이며 키워 주었다. 그래서 둘째 딸 이름은 ‘놋장아기’라 불렀다.

또 딸이 태어났다. 역시 마을사람들이 도와주었지만 이번에는 나무바가지에 밥을 해다 먹여 키워 주었다. 그래서 셋째 딸은 ‘가믄(검은)장아기’라 부르게 됐다.

가믄장아기가 태어나 두 살이 되어가자 이상하게 운이 틔었다. 부부는 하는 일 마다 잘 돼 날마다 돈이 모아졌다. 밭을 사고 마소가 우글대고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풍경을 달고 살게 되었다. 가믄장아기를 낳은 뒤 잠깐 사이에 거부가 된 것이다.

부부는 거지생활을 하며 얻어먹던 지난날들과 품팔이로 연명하던 고생들을 남의 일처럼 잊어버리고 점점 오만해져갔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딸아이들은 어느새 열다섯 살이 넘어갔다.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는 어느 날, 심심해진 부부는 딸들을 불러 앉혀 물었다.
 
“은장아기야, 너는 누구 덕에 호강하며 살고 있느냐?”
“아버님, 어머님 덕입니다.”
“아이구, 우리 큰 딸 기특하구나. 그럼 놋장아기야, 넌 누구 덕에 호강하며 살고 있느냐?”
“부모님 덕입니다.”
“그래, 우리 둘째딸 기특하구나. 자, 이번엔 우리 가믄장 아기는 누구 덕에 호강하며 살고 있느냐?”
“아버지 어머니 덕도 있지만, 하늘님, 땅님 덕이고, 내 배꼽 아래 선그믓 덕으로 먹고 삽니다.”

전혀 딴판으로 생각하는 가믄장아기의 대답에 부부는 기가 막혔다. 화를 벌컥 내며 소리 질렀다.

“이런 불효막심한 아이를 보았나?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버려라!”

벼락같은 호통에 가믄장아기는 입던 옷들과 얼마간의 양식을 검은 암소에 실어 집을 나섰다.
  “어머니 아버지, 잘 살고 계십시오.”

막내딸이 괘씸하긴 했지만 막상 작별인사를 하며 떠나려 하자 섭섭해진 부부는 다시 불러들일 심산으로 맏딸에게 말했다.

“동생더러 식은 밥에 물 말아서라도 먹고 가라고 해라.”

은장아기는 가믄장아기를 부모마음을 눈치 채고 시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똑똑한 가믄장아기를 다시 불러들이면 부모의 사랑이 옮겨질 우려도 있고, 장차 재산을 가르는 데도 이로울 게 하나도 없을 터였다.
은장아기는 노둣돌에 올라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가믄장아기야, 빨리 가거라! 아버지 어머니가 너 때리러 나오신다.”

고약한 언니의 속셈을 알고 있는 가믄장아기는 중얼거렸다.

“큰언니, 노둣돌 아래로 내려서거든 푸른 지네 몸으로 환생해 버리세요.”

노둣돌 아래로 내려선 은장아기는 푸른 지네가 되어 노둣돌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은장아기도 가믄장아기도 들어오지 않자 부부는 둘째딸을 불러 동생을 불러오라고 했다.

놋장아기 역시 시기심이 우러나와 두엄 위에 올라서서 가믄장아기에게 소리를 질렀다.
“가믄장아기야, 어머니 아버지가 때리러 오니 빨리 가버려라!”

놋장아기의 고약한 마음씨를 아는 가믄장아기는 괘씸해하며 중얼거렸다.

“두엄 아래로 내려서면 버섯으로 환생해버려라.”

놋장아기가 두엄 아래로 내려서자 버섯이 되어 두엄에 뿌리를 박고 서버렸다. 방안에 앉아 기다리던 부부는 놋장아기마저 소식이 없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얼른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문틀 위에 눈이 부딪혀 봉사가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부부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입고 쓸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재산만 축내다보니 부부는 다시 거지로 나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현용준(1996). 「제주의 신화」. 서문문고
현용준(1996). 「제주의 전설」. 서문문고
현용준(1996). 「제주도 민담」. 제주문화
고대경(1997). 「신들의 고향」. 중명

<자문위원>
현용준(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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